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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칠서령공 잉 제단비
도칠서령공 잉 제단비 생각건대 우리 순흥 안씨는 상호군 자미(子美)를 시조로 하여 상대를 내려와서 회헌(晦軒) 선조는 우리나라 도학을 시초로 세우고 향고에 태향된 영원한 유학의 종사(宗師)시다. 전하는 문순공 문숙공 문혜공 경질공에 이르러 이들 육현제중 다섯째 아들인 참판공 종신(綜信)이 우려파의 중시조시다. 자손이 남양주 이은(경기도)에 인연으로 살게 되었으며 이름이 높은 재상(宰相)이 대를 이어 나타나지 아니한 것은 존래 안씨 집안이 번성하였으나 잇따른 사화(士禍)에 연유되고 나라가 시끄럽고 어수선하게 되니 우리 선조는 홀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남쪽 살만한 곳을 찾아 양양(釀養) 복암동으로 자취와 이름을 감추고 관직을 외면하고 고향에도 가지 않고 자손에게 경계하기를 "벼슬을 하지 말 것이며 부귀를 구름 보듯이 농사를 업으로 할 것이며 시(詩)와 술로써 세상을 보내고 좋은 집과 귀히 되는 어떤 계책도 잊어버리라" 하였으며 따로 이은 집에 사정(思亭) 이라 현판을 달고 불우하게 생을 마치니 이로 인하여 자손이 예천에 살게 되었으며 여러 세대 혈육이 외로이 번성하지 못하여 조상의 성묘를 자주 못하게 되어 참판공 묘소가 있는 남양주 어으리 선산하에 아버지 휘가 선양(善良) 묘소가 있다고 하나 표석이 없어 찾지 못하니 그 자손이 어찌 통탄하지 않으랴. 부득이 복암동 뒷산에 설단하여 매년 시월에 제(第)를 올린다. 이곳 또한 낙향 선조가 늙어 돌아가신 곳임이 가히 근거가 있다. 그것은 옛건씨의 사정을 모방하여 암벽에 사정이라 새겼으니 영구불변의 징후이다. 오직 돌아보건대 우리 자손이 사단을 바라보며 이 정자에 올라 눈여겨 생각하여 따라서 흙으로 된 계단을 보수하고 연하여 무너지는 곳을 보수하여 대대로 무궁토록 전하리라.
병오년(1966) 팔우러 일 후손 승청 삼가 글을 지어 대한민국 60년 무오(1978)년 8월 일 고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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