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알기
ㆍ작성자 안성규
ㆍ작성일 2017-02-09 (목)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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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연원
 
순흥안씨는 순흥의 토족 성씨이다. 고려 신종(神宗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된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가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관향(貫鄕)을 순흥(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증손 안유(安裕=珦으로 개명하였다가 조선조 문종 어휘와 같게 되어 초명으로 쓴다)가 크게 현달하여 생활 근거지가 개성으로 나뉘어져 살게 되었다. 시조 [子美] 아들 3형제를 두었으니 영유(永儒), 영린(永麟), 영화(永和) 이며 이를 각각 1파, 2파, 3파라 부른다. 영유의 후손에 14개파, 영린의 후손에 4개파, 영화의 후손에 4개파가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 생활근거지가 파주 금촌으로 옮겨졌는데,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 전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으며, 종가는 서울 도동에 있다가 다시 이북 연백으로 옮겨졌다. 특히 관향지 순흥에 살던 종족들은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드러난 조상으로는 시조의 증손 안향이 1260년[고려 원종 1년]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령왕(忠烈王)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유학(儒學)의 학풍(學風)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門下)에서 백이정(白이正), 우 탁(寓倬) 등 훌륭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문묘(文廟)를 비롯한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있고, 경기도 부곡에 안자묘(安子廟)가 있다.
영린의 후손으로 안문개(安文凱 ∼1338)가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일로 원나라에 불리어 가 4년동안 억류되어 있었을 때 함께 있으면서 왕을 위한 경비를 국내에서 염출하여 조달하였는데 원나라 조정에서 종정부(宗正府)에 가두었다. 왕을 따라 귀국한 뒤에 첨의참리(僉議參理)가 되었고, 1327년(충숙왕 14)에는 왕이 원나라에 있었을 때 충절을 바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의 호를 받았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송천봉(宋天鳳)·홍언박(洪彦博)·이달존(李達尊)·이문정(李文挺)·최재(崔宰)·정운경(鄭云敬) 등 33인과 명경(明經)·은사(恩賜)각 2인을 급제시켰고 옥대(玉帶)를 하사받았다.
영화의 후손으로서 1324년(충숙왕11)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한 근재 (謹齋) 안축(安軸)은 충혜왕(忠惠王) 때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순흥의 자연경관을 노래한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었으며「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文集)을 남겼다.
그 외 시호를 받은 선조가 32명에 이르며, 그중 문(文)자 시호를 받은 이가 17명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안중근(安重根), 안병찬(安秉瓚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궐에 들어가 통곡함), 안승우(安承禹 충주(忠州)의 황강(黃岡) 싸움에서 전사한 전사 ),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안익태(安益泰 애국가 작곡), 백산 안희제(安熙濟), 안재홍(安在鴻)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순흥안씨의 시조(始祖)는 휘가 자미(子美)이다. [어떤 족보에는 공석(公石)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신종(神宗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되었으며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관향(貫鄕)을 순흥(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부인에 대한 기록은 실전하여 알지 못한다. 묘소는 소백산(小白山)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비석이 없어 찾지 못하고 있다.
1654년에 후손 순원군(順原君[應昌])이 의성현감(義城縣監)에 부임하였다가, 시조(始祖)의 제사가 단절되고 선조들의 유적이 민멸된 것을 보고 경향의 종친들의 협력을 받아, 순흥 평리촌(坪里村) [현 석교리(石橋里) 203번지]을 고택유지(古宅遺址)로 추정하고, 시조공과 아들 태사공(太師公=휘 孚)의 제단을 만들고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 이후 방손들의 제단과 합하여 졌다가, 1988년에 순흥 읍내리 비봉산 아래에 새로이 ·추원단(追遠壇)을 조성하여 이설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1일 전국의 후손 2천여 명이 참배하고 세사를 올린다.

갑신파보(甲申派譜 순조23,1824)에서 후손 기명(其命)이 진위(振威)에 사는 종친의 가첩의 기록에 근거하여, "시조공의 묘소는 동마암(東磨岩)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로서 추밀부사 광서(光瑞)의 따님이다." 하였다. 이는 이전 족보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실인데, 이전에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의 집에 소장된 구보(舊譜)에서 내사령(內史令) 정혁황(丁奕煌)의 사위에 안자미(安子美)로 기록하고 그 아래에 외손으로 태사공과 문성공의 휘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족보에 정식으로 올리지는 못하고 참고자료로 전하고 있다.
속설에, "안씨(安氏)의 초조(初祖) 안원(安援)은 본래 당(唐)나라 종실(宗室)인 농서이씨(농西李氏)였는데, 서기807년(당나라,헌종2, 신라,애장왕8)에 신라(新羅)로 건너와 개성(開城)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정착(定着)해 살았다. 그 후 경문왕(景文王) 때 와서 갑신란(甲申亂)이 일어나자 지춘(枝春)·엽춘(葉春)·화춘(花春) 아들 삼형제(三兄弟)가 난(亂)을 평정한 공(功)으로 安자로 (賜姓)하였다. 맏이 지춘( 枝春)은 방준(邦俊)으로 개명(改命)되어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고, 둘째 엽춘(葉春)은 방걸(邦傑)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으며, 세째 화춘(花春)은 방협(邦俠)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순흥안씨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으로, 광주안씨(廣州安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근거가 없어 현재 순흥안씨대종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역사인물에 대한 신상정보를 종합적으로 연구 관리하고 있는 국가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http://people.aks.ac.kr)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시조가 추밀공(樞密公) 영유(永儒), 별장공(別將公) 영린(永麟), 교서공(校書公) 영화(永和) 3형제를 두었다. 추밀공은 송 나라 가태 신유년에 출생하였으며, 바로 문성공 회선선생의 조부로서, 추밀원부사 상호군에 추봉되었다. 부인에 대하여는 실전하여 알 수 없다. 다만, 구보 기록에, "경주박씨 족보에서 계림군 박순(朴純)의 사위에 안영유(安永儒)가 등재되어 있으나 이는 우리 족보에 전해오지 않는 것이어서 참고로 기록해 둘 뿐이다." 하였다. 묘소는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甘谷里) 지장산(智藏山)에 있다. 후손 판서 상(王常)이 영천군수(榮川郡守=지금의 영주)로 부임하였을 때 재실 영모암(永慕庵)을 창건하고 위토를 마련하여 매년 10월 상정일(上丁日)에 제사를 지내왔다. 근래에 후손들이 묘소를 정비하고 '영모암관리위원회(永慕庵管理委員會)'를 설치하고 음력 10월 1일 순흥 추원단 제사를 올린 뒤, 오후 2시에 제사를 올린다. 슬하에 태사공 부(孚)를 두었다.
태사공 부(孚=가정 경진생)는 고려 신종 갑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태사문하시중(太史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우씨(剛州禹氏)로서 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 우성윤(禹成允)의 따님이다. 묘소는 순흥에 있다고 전해지나 표석이 없어 찾지 못하고 있다. 시조공과 함께 추원단에 제단을 조성하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슬하에 문성공 유(裕)를 두었다.
문성공은 휘는 裕(珦으로 개명하였다가 조선조 문종 어휘와 같게 되어 초명으로 쓴다), 자(字)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추밀공 영유(永儒)의 손자로서 송 가우 계묘년에 출생하였다. 1260년(원종 1)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령왕(忠烈王)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유학(儒學)의 학풍(學風)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門下)에서 백이정(白이正), 우 탁(寓倬) 등 훌륭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문묘(文廟)를 비롯한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있고, 경기도 부곡에 안자묘(安子廟)가 있어 음력 9월 12일에 기신제를 올리며, 음력 10월 4일 금촌 야동(冶洞)에 있는 현손 판서공[휘 종약(從約)]의 재사(齋舍)에서 망제(望祭)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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