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알기
ㆍ작성자 안성규
ㆍ작성일 2016-12-26 (월)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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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世 시조-안자미(安子美)
1世 시조-안자미(安子美)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추봉(追封) 신호위상호군 (神虎衛上護軍)
 

  약력(略歷) :

다른 족보에는 이름을 공석(公石) 이라 칭하였다.

고려신종조때 흥위위 보승별장 역임하고 신호위상호군추봉되었다.

 

배위의 성씨는 실전 되었다. 묘소는 순흥의 소백산 아래에 있다고 전해 오는데 표식이 없어 찾지 못하였다.

후손인 순원군 응창(應昌)이 의성현감으로 있으면서 순흥의 평리촌 유적지에 제단을 쌓고 제전을 마련하여 매년 10월 초하루에 제사를 올린다.

후손 기명(基命)이 만든 갑신파보에 진위(振威)에 사는 종인의 보첩에 의거하여 이르기를 공의 묘소는 순흥부 동쪽 영마암에 있으며 배위(配位)는 압해정씨(押海丁氏)로 추밀부사 광서(光瑞)의 따님이다 하였으니 이는 전보(前譜)에 실려있지 않은것이며 이제 영천 정원욱(丁元旭)의 집안 구보(舊譜)를 보니 진현관 대제학 문하시중을 지낸 경(瓊)과 그의 아들 옥당박사 문하시중 평장사 윤화(允樺)와 그의 아들 문하시중 평장사 태보내사령 혁황(奕煌)이 있고 그의 사이에 안자미(安子美) 가 기록되어 있으며 외손(外孫)의 난에 추밀공(樞密公) 태사공(太師公) 문성공(文成公)의 함자가 연이어 써 있었다. 그러나 신중히 하는 도리에 곧바로 쓸수가 없음으로 여기에 기록하는 바이다.

응창(應昌)이 사단기(祀壇紀)를 찬(撰) 하였다.

무오년(戊午年)에 후손 종욱(宗昱) 상봉(相鳳) 교덕(校悳)이 사단비를 세우고 추원재(追遠 齋)를 이건 하였으며 권상익(權相翊)과 이상영(李商永)이 재기(齋記)를 찬(撰) 하고 후손 종욱(宗昱)이 중수단기를 찬(撰) 하였는바 총록에 쓰여있다

 

他譜稱公石高麗神宗祖興威衛保勝別將追封神虎衛上護軍 配姓氏失傳墓順興小白山下云而無表未尋後孫順原君應昌帝義城築祀壇於順興坪里村遺跡置祭田 每十月朔日報祀後孫基命甲申派譜據振威宗人家牒云公墓在順興府東永磨巖配押海鄭氏樞密副使光瑞女此前譜所不載而今見永川鄭元旭家舊譜則進賢館大提學門下侍中瓊子玉堂博學士門下侍中平章事允樺子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奕煌女安子美外孫欄連書樞密公太師公文成公諱刻然基在愼重佛可直書故玆錄之應昌撰壇記歲戊午後孫宗昱相鳳校悳堅壇碑移建追遠齋晴山權相翊滄上李商永撰제齋記後孫宗昱撰重修壇記見總錄

 

 인적사항

    배위(配位) 부모(父母) 형제(兄弟) :실전됨

    자녀(子女) : 영유(永儒)[1] 영린(永麟)[2] 영화(永和)[3]

 

 

  세거지(世居地) : 순흥

 

  묘소(墓所) ;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비봉산

 

  시제(時祭) : 음력 10월 1일

 

 

 

  관련자료

1世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 *아들 자 , 아름다울 미*

 

 

시조(始祖)께서는 12세기말 고려(高麗)때 경북순흥(慶北順興= 當時 順安縣)에서 탄생(誕生)하셨다.

고려 신종(神宗)때 흥위위(興威衛)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내시고 후에 신호위(神虎衛)상호군(上護軍)을 추봉(追封)받으셨다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고 또 양위분의 묘(墓)도 실전이 되었는바 묘는 본시 순흥 소백산 하(小白山 下)에 모셨는데 묘의 표식물이 없어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후손 기명(基命)이 주관 발간(主管 發刊)한 갑신파보(甲申派譜) 즉 1824년 간행된 순흥안씨 3파댁 파보를 보면 진위 종인(宗人)의 가첩(家牒)에 우리 시조에 관하여 몇 가지 지적 기록된 사실을 알게되어 당시 종중에서 확실한 고증을 얻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조(휘 子美)의 묘는 순흥부 동 영마암(東永磨巖)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  추밀부사(樞密副使) 광서 녀(光瑞女)” 운운(云云)이나 전보(前譜)에 기록이 없고 당시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이보존한 구보를 열람한 바 “문하시중평장사태보내사령(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 혁황(奕 煌)-여(女) 안자미(安子美)”로 등재 돼 있고 그 외손(外孫)난에 2세 추밀공(樞密公, 3세 태사공(太師公), 4세 문성공(文成公)의 휘자(諱啣)이 연계 등재돼 있으나 신중한 일로써 직서불가(直書不可)하여 이에 응창 단기(應昌 壇記)를 기록해둔다. 는 뜻을 족보 기록에 남겨두고 있다.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시조사단(始祖祀壇)

가운데가 시조단비(壇碑)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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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사단 전경


 
안자미(安子美)
1世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 *아들 자 , 아름다울 미*
시조(始祖께서는 12세기말 고려(高麗)때 경북순흥(慶北順興= 當時 順安縣)에서 탄생(誕生)하셨다.
고려(高麗) 신종(神宗) 때 흥위위(興威衛)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내시고 후에 신호위(神虎衛)상호군(上護軍)을 추봉(追封) 받으셨다.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고 또 양위분의 묘(墓)도 실전이 되었는바 묘는 본시 순흥 소백산 하(小白山 下)에 모셨는데
묘(墓)의 표식물이 없어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후손(後孫) 기명(基命)이 주관 발간(主管 發刊)한 갑신파보(甲申派譜) 즉 1824년 간행된 순흥안씨 3파댁 파보(波譜)를 보면
진위 종인(宗人)의 가첩(家牒)에 우리 시조(始祖)에 관하여 몇 가지 지적 기록(記錄)된 사실(事實)을 알게되어
당시 종중에서 확실한 고증을 얻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조(휘 子美)의 묘(墓)는 순흥부 동영마암(東永磨巖)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  추밀부사(樞密副使) 광서(光瑞)의 녀(女)” 운운(云云)이나
전보(前譜)에 기록이 없고 당시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이 보존(保存)한 구보(舊譜)를 열람한 바
“문하시중평장사태보내사령(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 혁황(奕煌)-여(女) 안자미(安子美)”로 등재 돼 있고
그 외손(外孫)난에 2세 추밀공(樞密公, 3세 태사공(太師公), 4세 문성공(文成公)의 휘자(諱啣)이 연계 등재돼 있으나
신중한 일로써 직서불가(直書不可)하여 이에 응창 단기(應昌 壇記)를 기록(記錄)해둔다. 는 뜻을 족보(族譜) 기록에 남겨두고 있다.
 
安子美[안자미]
 一一七○年高麗毅宗二四庚寅年에서一一八○年明宗十年庚子間에誕生推定되다
興威衛保勝別將으로神虎衛上護軍에追封되시다

○墓는順興小白山下라하나失傳하고後孫順原君인應昌이一六五四年甲午에順興坪村里遺址에設壇하고
十月一日에報祀하니應昌이築壇實記를짓고一九一八年戊午에遺址를重修하여門墻을新築하고表石을立하며
齋舍를移建하니後孫宅鎬가上樑文을짓고永嘉權相翊이重修記를짓다
一九八八年戊辰에順興飛鳳山에綜合된追遠壇을築造하고報祀하다總錄에있다
配는失傳되다

○삼가생각컨대前後譜에다配失傳이라썼고또甲申派譜에는振威에사는宗人의家譜에配는押海丁氏이며
樞密副使인光瑞의女라하였으나傳疑로記錄한다하다
今修譜時에는積城사는宗人衡中이가丁氏舊譜를보니諱瓊이있는바進賢힉太學士이며子는允樺으로門下侍中이고그子는奕煌으로
平章事이고配는鄭氏로父는門下侍中인彦이고그아래女行에公의諱와職啣이連書되어있고
以下兩世의諱가外孫註欄에備錄되어있으니기록되어온것이昭詳하다하였다
또堤川사는宗人鳴玉이역시丁氏舊譜를祥考한것이기록되어오니聞見의넓지못함이옛일이라어찌限定이있으리오
甲申譜에서말한振威宗人云云은대개넓은범위의名稱이요一家의私藏으로진실로믿기어렵다
이제丁氏의板本이분명하다면두宗人이본바가비슷이合致되어의심할바가없지만數百年間미쳐겨를을내지못한일을
감히例에따라記錄치못하노라註錄에이와같이싣노니後日다시詳考할지어다
 

 

시조 흥위위보승별장 추봉 신호위상호군공 관향유지사단기

(始祖 興威衛保勝別將 追封 神虎衛上護軍公 貫鄕遺趾祀壇記)

세적문헌록(世蹟文獻錄)-휘 응창(應昌)선조께서 적은글

 

1654년 시조공의 17대손인 당시 의성현감으로 계시던 응창(應昌)선조께서 주가 되어 단(壇)과 향려비를 세워 세사를 받들어 왔다.

 

시조(始祖)

시조 흥위위보승별장 추봉 신호위상호군공 관향유지사단기(始祖 興威衛保勝別將 追封 神虎衛上護軍公 貫鄕遺趾祀壇記)

 

삼가 상고하건대 우리 순흥안씨가 고려시대로부터 동방의 대성(大姓)이니 휘(諱)자미(子美)께서 신호위상호군으로

추봉을 받으신바 참으로 안씨의 시조(始祖)이시다.

호군공께서는 세 아드님을 낳으신 바 3개파로 나눠지니 장남은 추밀부사(樞密副使) 영유(永儒)이시고,

추밀공께서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 부(孚)를 낳으시고 태사공께서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향(珦)을 낳으시고

문성공께서 순평군(順平君) 문순공(文順公) 우기(于器)를 낳으시고 문순공께서 순흥군(順興君) 문숙공(文淑公) 목(牧)을 낳으시고

문숙공께서 순성군(順成君) 문혜공(文惠公) 원숭(元崇)을 낳으시고 문혜공께서 형조전서(刑曹典書) 경질공(景質公) 원(瑗)을 낳으시니 즉 제1파이다.

 

차남은 신기별장(神騎別將) 영린(永麟)이시니 이부시랑(吏部侍郞) 정준(貞俊)을 낳으시고,

시랑공께서 검교(檢校) 군기감(軍器監) 성철(成哲)을 낳으시고, 검교공께서 문의공(文懿公) 문개(文凱)를 낳으시고,

문의공께서 순성군(順成君) 천선(千善)을 낳으시니 즉 제2파이다.

 

다음은 영화(永和)이시니 득재(得財)를 낳으시고, 득재께서 희서(希諝)를 낳으시고

희서께서 제학(提學) 석(碩)을 낳으시고 제학공께서 문정공(文貞公) 축(軸)을 낳으시니 즉 제3파이다.

 

모두 도덕문장(道德文章)과 공훈(功勳) 높은 장상(將相)으로 대대(代代)로 그 거룩함을 이으시고

고려시대가 끝나고 우리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더욱 크게 번창하사 큰 선비와 현량(賢良)한 신하가 많이 나왔으며

모두 능히 역대 조정(朝廷)을 도우사 명신(名臣)이 되시어 혹은 개국창업(開國創業)의 공훈(功勳)을 이루고

혹은 정치를 도와 태평시대를 이루니 기린각(麒麟閣:공신의 초상을 걸었음)에 초상(肖像)을 그리어 거니

명성(名聲)이 역사에 빛나며 외손(外孫)으로 왕후(王后)가 되신 분이 십여분이시다.

 

호군공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5백여년전 이르되 자손의 번창과 가문(家門)의 귀(貴)하고 높음이 더욱 성하시니

아! 위대하시도다.

 

순흥부 평리촌(坪里村)은 호군공의 고향이시라 후손들이 이곳에 거주하는 자 호적(戶籍)에 많고 옛집의 큰 나무가 지금도 있는지라

정해년(丁亥年) 봄에 불초(不肖)가 순흥 도강리(道講里)의 16대조 추밀공(樞密公) 묘소와 백운동(白雲洞)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14대조 문성공(文成公)의 영정(影幀)에 배려하고 이어 호군공과 문성공께서 대대로 전하신 옛집 터를 찾아본즉 옛 부성(府城)의

남쪽 수리(數里)되는 평리촌 동향(東向)의 땅이니 문성공의 세연지(洗硯池)라 하는곳이 그 아래에 있는지라 도 부성 동쪽 1리에

제학공(堤學公) 문정공 부자분이 사셨던 곳을 찾으니 곁에 옛날 우물이 있어 비석을 세워 사현정(四賢井)이라 새겼으니

대개 사현(四賢:제학공, 문정공, 문경공, 제주공)께서 같은 우물물 마신 것을 표함이라.

 

내가 탄식하여 여러 종인(宗人)에게 말하기를 사현께서 쓰신 그 우물도 오히려 표석(表石)을 세웠으나

우리 선조께서 서로 전해오신 옛집에는 표시한 것이 없어 황폐하고 식별(識別)할 수 없노라,

또 호군공과 태사공의 묘가 이 고을에 있었다고 옛말에 전해오나 연대가 오래이고 능곡(陵谷)이 변천하여

그 지점을 알 수 없으니 이일은 평생의 한이로다.

 

그윽히 듣건대 근세(近世)에 대가(大家)인 청주한씨, 평상신씨, 안동권씨, 의성김씨들이 다 그들의 시조(始祖)를

고향에서 제사 지내고 조상의 은혜를 갚는 일을 극진히 한다하니 우리선조 호군 태사 두 분이 남기신 적선(積善)과

지손의 오랜 번성함이 저들 몇 집안에 두지지 않거늘 오히려 조상을 제사지내고 정성을 베풀 장소가 없으니 어찌 자손들의 수치가 아니리오.

생각컨대 이 옛터는 실로 호군공께서 대대로 사신곳이니 이제 비석을 세워 지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 보는 곳이 되게 하고

또 그 곁에 단(壇)을 설치하고 근처에 전답(田畓)을 마련하여 제수를 풍족하게 하고 종인(宗人)으로 하여금 제사를 번갈아 맡게 하고

송(宋)나라 유현(儒賢)들이 정한 예식에 따라 10월1일 아침에 모여 제사를 드리는 것을 영원한 규칙(規則)으로 삼아

길이 바꾸지 않는 것이 조상을 받드는 아름다움이 아니리오 라고 말하였다.

 

다들 응낙하는지라 즉시 통문하여 동종(同宗)에 널리 고하여 각기 돈을 내어 사역(事役)을 도우니

아! 자고로 거가대족(巨家大族)이 조상의 충효근검(忠孝勤儉)으로 말미암아 성립되지 않은 것이 없고,

또 자손들의 완악(頑惡)과 오만으로 쇠퇴 멸망하지 낳음이 없나니 시조 호군공께서 언덕진 동산에 숨은 덕으로

집을 다스리고 자손이 다 부조(父助)의 교훈을 실천하고 힘써 전하니 증손 문성공에 이르러서는

유학(儒學)을 주창하여 밝히고 유풍(儒風)을 크게 열어 큰 스승의 계통을 곧게 이어 동방의 유종(儒宗)으로 우뚝 서시니

문묘(文廟)에 배향되시고 천추(千秋)에 제사를 받으시니 이는 참으로 유학의 준칙(準則)이라 자손에 본보기가 되나니

그 택리(宅里)를 표시하여 후인들이 보고 느끼게 하여 인간의 도리와 사회의 풍교에 도움이 되게 함이 어찌 적다 하리오.

이런 일은 가히 간략히 적지 않을 수 없고 대대로 전해오는 계파(系派)를 갖추어 함께 적는 것이며

관향(貫鄕)의 시향(時享)올리는 일과 비를 세운 전말(顚末)에 대하여 감히 새기기를 청하여 적는 바이니

엎드려 빌건대 살펴 보시옵소서.

 

갑오(甲午 1654) 1월 15일 후손 부사(府使) 응창(應昌) 삼가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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