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지>
제2권 문화재와 인물 | 제2편 성씨와 인물 | 제2장 고려·조선조 인물*
안종신 安從信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고려 말 공양왕 때 형조판서와 지신사(知申事)를 역임하고 조선 건국 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에 다녀오는 등 고려·조선조에 걸쳐 벼슬한 원(瑗)의 아들이다.
공신 또는 당상관의 자손으로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특별 채용하는 음서로 동반 종4품인 조봉대부 전라도경력에 임명된 뒤 음악에 소질이 있어 장악원에서 관직생활을 하였다. 사후에 아들이 현달하여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는 진건면 배양리에 있다.
9世 참판공파 파조(휘 종신從信) 묘
양주군 진건면 배양리(楊州郡 眞乾面 培養里) 구 원풍양 왕숙탄 어은동(舊 原豊壤 王宿灘 漁隱洞) 후산 해좌기향(亥坐己向) 지원에 쌍분(雙墳)으로 모셨다. 1650년 경인춘(庚寅春)에 할아버님의 9대손인 순원군(順原君) 응창(應唱)이 묘지(墓誌)를 만들어서 묘 광남(墓 壙南)에 묻었다.
1914년 갑인춘(甲寅春)에 16대손 도(濤)가 주관하고 후손(後孫)들이 합력(合力)해서 묘비(墓碑)급 의물(儀物)을 개수수의(改修隧儀=고치거나 다시 만듬)하였다. 할아버님은 이조3대 태종(太宗)과 4대 세종(世宗)조때 조정(朝廷)에서 고위관직을 지내신 분 이 신데 생졸년월(生卒年月)과 행세연도(行世年度)등이 실전된 고로 고증문헌(考證文獻)을 찾고 있으나 아직 정확한 사실(史實)을 알 수 없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매년 음10월3일 세사를 올린다.
부인은 증정부인(贈貞夫人) 고려(高麗)종실(宗室) 왕씨(王氏)이시고 선친(先親)이 영복군(永福君) 휘(諱) 격(隔)이시고 조부(祖父)는 순안군(順安君) 휘(諱) 방(昉)이시며 증조(曾祖)가 낙낭군(樂浪君) 휘(諱) 수(琇)이시다. 슬하에 1남 진(進)과 1녀를 두셨다.
묘(墓) 쌍분(雙墳)
<子>
안진(安進)
10世 안진(安進) *나아갈 진
할아버님은 이조(李朝)초엽(初葉)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내셨다.
배(配)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이시고 선친(先親)이 이조(李朝) 3대 태종(太宗)왕의 부마(駙馬=임금의 사위 즉 태종의서랑(壻郞)이고 세종(世宗)의 매부(妹夫)임)이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강안공(康安公) 조대림(趙大臨)公이시다. 그리고 조부(祖父)는 조선왕국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영의정(領議政), 평양백(平壤伯)을 역임(歷任)한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公이시다.
從信종신
全羅都觀察黜陟使 經歷所經歷 贈嘉善大夫 兵曹叅判
配 贈貞夫人 高麗宗室 王氏 父 永福君▣ 祖 順安君 昉 曾祖 樂浪君 琇
外祖 監司 南陽洪彛
○墓 楊州 眞乾面 培養里 原豊壤王宿灘漁隱洞 亥坐 雙墳 有表石 九代孫應昌 撰誌
○公及同敦寧公墓碣剝落無以識別迄至 一九一四年甲寅 春改修儀物一切鐫竪兩代碑文印出廣傳諸?以表其蹟
歲祀 十月三日
전라도관찰출척사(全羅都觀察黜陟使)와 경력소경력(經歷所經歷)을지내고,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叅判)에 제수되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고려종실 왕씨(王氏)로,
부친은 영복군(永福君) 격(▣)이고, 조고는 순안군(順安君)방(昉)이며 증조는 낙랑군(樂浪君)수(琇)이다
| 姓 名 | 안종신(安從信) | 性 別 | 남 (男) | | 本 貫 | 순흥 (順興) | 職 役 | 관직자 | | 出 生 日 | | | 死 亡 日 | | | 最終官職 | 경력(經歷) | 出仕方法 | 未詳 | | 出 仕 日 | | | 子 女 | 男 : 1 女 : 1 總 : | | 異 名 | | 號 | | | 字 | | 諡 號 | | | 典 據 | | 典據對象 | 典 據 | 페이지 | 기본 | 安東權氏成化譜 | 44 | 기본 | 文化柳氏嘉靖譜 | 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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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備 考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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