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알기
ㆍ작성자 안성규
ㆍ작성일 2017-02-09 (목)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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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판공파
 
파조는 9세 종신(從信)으로 4세인 문성공(文成公 諱 珦)의 5대손이며, 경질공(諱 瑗)의 5남이다. 벼슬은 전라도 관찰출척사를 지냈으며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추증받으셨다. 한일합방의 원흉 이등박문을 암살하여 여순 감옥에서 돌아가신 안중근의사가 참판공 후예이다.

참판공파의 유래

참판공파는 八세 경질공(景質公: 휘 원瑗)의 다섯째 아드님이신 참판공 휘 종신(從信)께서 파조(派祖)이시다. 공은 음직으로 조봉대부(朝奉大夫) 전라도경력(全羅道經歷)을 지냈으며 또한 음율(音律)을 잘 아시어 장악원(掌樂院)에서 오래 벼슬하였다. 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개성왕씨(開城王氏)인데 부친은 고려왕실의 영복군(永福君) 왕격(王王?이다. 우리 안문에서 고려 왕실에 장가든 분은 참판공 한 분 뿐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배양리(京畿道楊州郡眞乾面培養里) 해좌에 양위분이 쌍분으로 모셔져있다.

공에게는 아드님 한 분과 따님 한 분이 계셨는데 아드님이신 휘 진(進)께서는 벼슬이 가정대부(嘉靖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이고, 배위는 정부인(貞夫人)평양조씨(平壤趙氏)인데 부친은 태종(太宗)대왕의 사위인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대림(大臨)이다. 돈녕공의 묘소는 참판공 묘소 아래에 합폄(合?)으로 모셔져 있다.

돈녕공 휘 진(進)께서는 장남 휘 잉(扔), 차남 휘 부(拊), 3남 휘 희(㩘), 4남 휘 윤(掄), 5남 휘 근(㨷), 6남 휘 탁(擢)의 아들 여섯분을 두시어 모두 계파조(系派祖)가 되시었는데, 종원은 모두 이 분들의 자손으로서 크게 번성하였다. 참판공파에는 안문(安門)에서 위선사업(爲先事業)을 처음 시작하신 순원군(順原君) 휘 응창(應昌) 선조, 안중근(安重根) 의사, 독립운동 및 국민계몽가 안재홍(安在鴻) 선생, 안중근 의사의 조카로서 광복군에서 활약, 광복후 육군중장예편, 초대독립기념관장 및 대종회회장을 역임하신 춘생(椿生)선생 등이 계신다.


참판공파의 지파(支派)

1) 도칠서령공(都漆署令公) 계(系)
ㅇ. 도칠서령공(都漆署令公) 약전(略傳)
도칠서령공 휘 잉(扔)은 돈녕공 휘 진(進)의 큰 아드님이시다. 생졸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 벼슬은 도칠서(都漆署)의 영(令)을 지내셨다. 배위는 청주양씨(淸州楊氏)인데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화(和)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에 계시다고 전해오지만 찾지 못하고 파주군월롱면(坡州郡月籠面) 덕은4리에 사단(祀壇)을 설단하고, 재실(齋室) 덕현재(德峴齋)를 건립, 이곳에 59위(位)의 위패를 모시고 음력 10월 7일에 시향을 올린다.

공께서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셨는데, 큰아들 휘 계충(繼忠)은 벼슬이 충순위(忠順衛)이고 장흥고(長興庫)의 영(令)을 지내신 영암황씨(靈岩黃氏) 상(裳)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다. 묘지는 파주의 월롱면 덕은리에 있는 금봉산(金峰山) 밑의 묘좌에 모셔져 있다.

계충의 아들은 독자로서 휘가 찬(璨)인데 자는 찬지(粲之)이며 1507년에 태어났다. 무예가 뛰어나서 고을의 무예시험에 합격했다. 벼슬은 초지만호(草芝萬戶)를 지냈다. 배위는 함양박씨(咸陽朴氏)인데 목사(牧使)를 지내고 천령군(天嶺君)에 봉해진 영창(永昌)의 따님이다. 묘지는 부친묘소 밑의 자좌에 있었으나 같은 산 후곡(後谷)의 유좌로 이장하였다. 아들 5형제와 딸 4형제를 두었다. 친정 조카 이민헌(李民獻)이 지은 묘갈명이 있었으나 비바람에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으므로 다시비석을 세웠다.

도칠서령공의 둘째아들은 휘가 계림(繼林)인데 파평윤씨(坡平尹氏) 흡(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휘가 순(洵)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다. 순은 김해김씨(金海金氏) 원식(元植)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두었다.

공의 따님은 첨정(僉正)을 지낸 김상(金? 安山人)에게 출가했다.


2) 교리공(校理公) 계(系)
ㅇ. 교리공(校理公) 약전
교리공 휘 부(拊)는 돈녕공 휘 진(進)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생졸년월은 알 수가 없고 관직이 통훈대부(通訓大夫) 교리(校理)라는 것만 전해온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묘소는 실전했다.

자손이 없으므로 후사(后嗣)로서 선량(善良)을 양자로 맞았다. 휘 선량에 대한 기록도 전해오는 것이 없고 다만 묘지가 광주군 퇴촌면 도지동이라 기록되었으나 찾지 못하여 양양(襄陽 예천)의 동쪽 감천현(甘泉懸)의 복암산(?/岩山)에 설단하고 매년 十월十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선량(善良)의 큰 아들은 휘가 수인(壽仁)이고 통훈대부 대정현감(大靜縣監)을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묘소는 감천면 포동(甘泉面浦洞) 간좌에 합폄(合?으로 모셔져 있다. 기록상으로는 공의 시대부터 후손들이 경기도 광주에서 경북예천(慶北醴川)으로 옮겨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의 둘째 아들은 휘가 달(達)인데 전해오는 기록이 없고 다만 평북(平北) 정주(定州)로 옮겨갔다고만 전해진다.


3) 장사랑공(將仕郞公) 계(系)
ㅇ. 장사랑공(將仕郞公) 약전(略傳)
장사랑공 휘 희(?는 돈녕공 휘 진(進)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1432년에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학문이 널리 알려졌다. 지방 향시(鄕試)에서 수석으로 합격하기도 하여 기대가 컸었는데 약관 20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다. 벼슬은 장사랑(將仕郞)이었다. 배위는 청주송씨(淸州宋氏)이고 부친은 판서(判書)를 지낸 평양공(平壤公) 처관(處寬)이다. 묘지는 남양주시 진건읍 오룡동 건좌에 합폄으로 모셔져 있다. 7대손 응창(應昌)이 지은 묘지(墓誌)가 있고 17대손 상섭(商燮)이 지은 묘비명(墓碑銘)이 있다.

공은 아드님이 독자(獨子)이셨다. 독자 아드님은 휘가 계송(繼宋)이요 자는 자윤(子胤)이며 호는 박전경수(薄田耕?이다. 1452년에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고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를 지냈다. 돌아가시자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에 증직되었다. 공은 천성이 순박하여 벼슬에 큰뜻이 없어 현자(賢者)들과 시주(詩酒)를 즐기며 교류하였다. 특히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는 가깝게 사귀면서 의를 돈독히 했다. 배위는 전주이씨인데 세종대왕의 손녀딸이었다. 이씨부인은 궁중에서 시집왔으나 가계를 잘 운영하여 자손들을 훌륭하게 길렀다. 부인의 부친은 세종대왕의 아드님인 계양군(桂陽君) 증(?)이다.

공은 6남 5녀의 많은 자손을 낳았다. 큰아들 휘 광수(光?)는 승사랑(承仕郞)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둘째아들 휘 광범(光範)은 정략장군(定略將軍)이고, 셋째아들 휘 광렬(光烈)은 참봉(參奉)이고, 넷째아들 휘 광윤(光胤)은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다. 다섯째 아들은 휘 광익(光翊)인데 무과에 급제하고 우후(虞侯)를 지냈고, 여섯째 아들 휘 광옥(光沃)은 부사과(副司果)을 지냈다.

공의 큰사위는 이문량(李文樑: 星州人)인데 주부(主簿)를 지냈고 둘째 사위는 이경장(李敬長: 延安人)인데 승지(承旨)를 지냈다. 셋째 사위는 어숙정(魚叔貞:從人)인데 찰방(察訪)을 지냈다. 넷째 사위는 조응경(趙應卿)인데 찰방(察訪)을 지냈다. 다섯째 사위는 김강(金綱)인데 한림(翰林)이었다.

장사랑공의 현손(玄孫) 휘 종도(宗道)는 문과에 급제하고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오대손 세복(世復)은 공신에 책훈되고 순계군(順溪君)에 봉해졌다. 순계군의 둘째아드님 휘 몽윤(夢尹)은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훈되고 순양군(順陽君)에 봉해졌다. 순양군의 큰아드님은 휘가 응창(應昌)인데 효종(孝宗)이 임금이 되기 전에 사부(師傅)로 있었으며 후에 순원군(順原君)에 봉해졌다.

응창께서는 의성현령(義城縣令) 때 시조가 처음 거주하시던 순흥(順興)을 찾아가셔서 향려비(鄕閭碑)를 세우시는 등 조상님들의 유적지를 기리셨다. 또 직계 조상님들의 묘갈과 묘지를 세우고 순흥안씨의 두 번째 족보인 기해보(己亥譜)를 발간하는 등 우리 순흥안씨의 위선사업(爲先事業)을 가장 많이 하셔서 오늘날 후손들이 그분의 노력으로 시조의 옛터를 보존할 수 있게 되는 등 큰 혜택을 입고 있다.

장사랑공(將仕郞公)의 5대손 세걸(世傑)은 공의 현손 휘 종도(宗道)의 여섯째 아드님으로서 명종조(明宗朝) 무과(武科)에 올라 종성부사(鍾成府使)로 남원(南原)에 전임중(轉任中) 임진왜란(壬辰倭亂)을 當하여 장남인 선무랑공(宣武郞公) 몽량(夢良)과 차남인 무장현감(茂長縣監) 삼부자(三父子)가 순절(殉節)하였는데 그 와중에 가족도 분산되어 시위(屍位)와 의이(衣履)를 수습하지 못하니 휘일(諱日)과 몰후(歿後)의 사적이 전하여 질 수가 없게 되었다. 마땅히 나랑에서 상찬하여야 할 공훈을 가세(家勢)의 쇠락으로 자손이 미쳐 나라에 주천하지 못 하니 통탄스러운 불효가 되었다. 후손 상섭(商燮)이 겨우 오룡동 선영하(先塋下)에 설단(設壇)하여 매년 10월 4일 아버지 부사공과 장남 선무랑공을 기리는 세사를 올리고 있으며 차남 무장현감 휘 몽정(夢井)은 진주(晉州)에 설단하여 매년 10월 15일에 세사를 올리고 있다.

장사랑공 후손들은 참판공파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번성하였다.


4) 서령공(署令公) 계(系)
ㅇ. 서령공(署令公) 약전(略傳)
서령공 휘 윤(掄)은 돈녕공 휘 진(進)의 넷째 아드님이시다. 생졸자료가 전해오는 것이 없다. 관직은 서령(署令)을 지내셨다. 배위는 첫부인은 함양여씨(咸陽呂氏)인데 부친은 광흥수(廣興守) 종경(宗敬)이다. 계배(繼配)는 고성이씨(固城李氏)인데 부친은 부사(府使)를 지낸 비(賁)이다. 묘지는 양주군 어은동 자좌에 첫부인과 합폄되어 있고 후배의 묘는 공의 묘소 좌측으로 10여 보 떨어진 곳 건좌이다.

공은 아들 셋과 딸 네 분을 두셨다. 큰 아들 휘 세량(世良)은 1465년(세종 을유)에 태어나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1512년에 별세했다. 첫 부인은 함양여씨(咸陽呂氏)이다. 계배(繼配)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며 부친은 군수를 지낸 원영(源英)이다.

둘째 아들은 휘가 세일(世逸)인데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다. 배위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이며 묘소는 제천시 신백동에 합폄으로 모셔져 있다.

셋째 아들은 휘가 세준(世俊)인데 생졸년월이 전해오지 않으며 사옹원(司甕院)직장(直長)을 지냈다. 배위의 성씨나 두분의 묘소는 전해오지 않는다.

공의 큰사위는 어맹진(魚孟津: 咸從人)이고 둘째 사위는 김유악(金由岳: 江陵人) 인데 판관(判官)을 지냈고 셋째 사위는 윤사흡(尹士洽)이고 넷째 사위는 윤원(尹元)이다.

공의 큰 아들 세량(世良)은 아들 둘과 딸 세 분을 두었다. 장자인 의(懿)는 1497년에 태어나서 생원시에 합격했고 문화유씨(文化柳氏) 소원(紹源)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7남을 두었고 묘지는 할아버지 산소 밑의 자좌에 쌍분으로 모셔 있다. 차남은 여(慮)인데 생원시에 합격하고 건원릉(健元陵) 참봉으로 있다가 연산군 시절에 의를 지키다가 순사하였다. 첫 부인은 전주이씨이고 계배는 강릉최씨(江陵崔氏)인데 묘소는 세분 모두 선영 밑에 모셔져 있다. 아들 세 분을 두었다. 세량의 큰사위는 홍영숙(洪永淑), 둘째 사위는 남공좌(南公佐), 셋째 사위는 김세영(金世榮)이다.

공의 둘째 아들 세일(世逸)은 큰 아들이 맹손(孟孫)이고 둘째 아들은 계손(季孫)인데 일체의 기록이 전해오지 않고 있다.

공의 셋째 아들 세준(世俊)은 아들 두 분을 두었는데, 큰 아들 휘 상(想)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전생시(典牲寺)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배위는 태원안씨(太原安氏)인데 판서(判書) 창(昌)의 따님이다. 묘소는 개성(開城)의 청교면남주원(靑郊面南住院) 간좌에 모셔져 있다. 아들 효삼(孝參)과 딸 두 분을 두었다. 그 이하의 후손들은 기록이 없다. 둘째 아들은 휘 정수(正?)인데 배위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이고 묘소는 광주(廣州) 고읍내동(古邑內洞)에 있다. 다른 자료는 기록이 없다.

서령공 후손들 중에, 13세 여(慮)의 후손으로 28세 인수(仁壽)의 세 아들인 태진(泰鎭), 태현(泰鉉), 태훈(泰勳)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려 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돌아가셨고 그 아들들도 부친들의 대를 이어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특히 태현의 두 아들과 태훈의 세 아들들은 모두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맹렬하게 조국광복을 위해 힘쓰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태훈의 큰 아들이 바로 안중근의사로서 중국 하얼빈에서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총살하여 한국 국민들의 기백과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리며 우리의 자존심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태진의 손자 춘생(椿生)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여 국군 양성에 큰 힘을 보탰으며 육군중장으로 예편 후 국회의원, 독립기념관장 등을 역임하고 순흥안씨 대종회장도 역임했다.


5) 부정공(副正公) 계(系)
ㅇ. 부정공(副正公) 약전(略傳)
부정공 휘 근(㨷)은 돈녕공 휘 진(進)의 다섯째 아드님이시다. 생졸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 통훈대부(通訓大夫) 군기시(軍器寺) 부정(副正)을 지내셨는데 구비(舊碑)에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龍?/衛) 부호군(副護軍)이라 적혀 있다. 배위는 숙인(淑人) 안동김씨(安東金氏)이고 부친은 부사(府事) 계로(季老)이다. 부정의 묘소는 광주군 퇴촌면 도수리의 지사곡(池寺谷) 자좌에 모셔져 있고 배위의 묘소는 공의 묘소로부터 위쪽으로 4, 5보 떨어진 자좌에 모셔져 있다. 재실 모선재(慕先齋)에 115위의 위패를 모시며 매년 10월 5일에 시향을 지낸다. 이곳에 부정공의 묘소가 있은 후로 대대로 후손들이 이곳에 묘소를 잡고 있다.

부정공은 아들 셋과 딸 한 분을 낳았다. 큰 아들 선량(善良)은 출계(出系)했고 둘째 아들은 휘가 선문(善文)인데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배위는 전주 이 씨인데 부친은 사직(司直)을 지낸 계동(季潼)이다. 아들은 없고 딸만 두 분을 두었는데 큰 사위는 김기(金驥 :慶州人)이고 둘째사위 방응선(房應善)은 봉사(奉事)를 지냈다. 셋째 아들은 휘가 선무(善武)인데 1453년에 태어나서 생원시에 합격하고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인 청주경씨(淸州慶氏)이고 부친은 첨지(僉知)를 지낸임(?/任)이다. 사위는 최정(崔瀞: 全州人)인데 군수를 지냈다.

셋째 아들 휘 선무(善武)는 아들 세 분을 두었다. 큰아들은 휘가 응원(應元)인데 연산(燕山)군 갑자에 태어나서 상의원(尙衣院) 주부(主簿)를 지내고 임자년에 돌아가시자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고 배위는 증숙부인(贈淑夫人) 덕수이씨(德水李氏)이고 부친은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기(?)이다. 아들 넷과 딸 한 분을 두었는데 큰 아들 휘 용(容)은 세마(洗馬), 용안현감(龍安縣監)을 지냈고 둘째 아들 휘 관(寬)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한 다음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지냈으며, 셋째 아들 휘 굉(宏)은 음직(蔭職)으로 통사랑(通仕郞)을 지냈다. 후사에 대하여 전하여지지 않는다. 넷째 아들 휘심(審)은 1543년에 태어나서 생원시에 합격하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사위는 김귀서(金龜瑞: 光州人)인데 현감을 지냈다.

좌통례 휘 선무(善武)의 둘째 아들은 응형(應亨)이고 셋째 아들은 응의(應義)이다. 두 분 아들에 대한 기록이 전하여지지 않는다.

부정공 후손으로는 휘 심(審)의 후손으로 18세 휘 여석(如石)이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에 올랐고 23세 휘 기영(驥泳)이 문과에 급제하여 1866년 병인양요 때 순무영종사관(巡撫營從事官)으로 회격문(回檄文) 기초를 돕고 후에 승지에 올랐다. 휘 기영의 조부 생원 휘 유상(有相)은 선비의 모범으로 추앙 받으며 학문을 중시하였다.

휘 유상은 두 아드님을 두었는데 두 분도 다 생원이었고 그 중 2자이신 성균생원 휘 경위(景褘 호 順窩)도 두 아드님을 두어 큰 아드님 휘 세영(世泳 호 蘆浦)은 생원, 둘째 아드님 휘 기영은 문과 급제 하니 3대에 걸친 5인의 유학자가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1881년 승지 휘 기영이 대원군(大院君)의 고종퇴위시도에 연루되어 형을 받으므로 이후 문중이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휘 경위의 원형자기(圓形瓷器)로 된 묘지(墓誌)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아드님 휘 세영이 선친의 글을 책으로 정리한 《순와유고(順窩遺藁)》와 휘 세영의《노포미정고(蘆浦未定藁)》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노포미정고》는 귀중본으로 관리되고 있다.


6) 사용공(司勇公) 계(系)
ㅇ. 사용공(司勇公) 약전(略傳)
사용공은 돈녕공 휘 진(進)의 여섯째 아드님으로 휘가 탁(擢)이시다. 1449년(세종 31년) 기사에 태어나셨다.

관직은 사용(司勇)을 지내셨다. 1516년(中宗 甲子)에 돌아가시니 향년 68세였다. 배위는 여산송씨(礪山宋氏)인데 진사(進士) 근(根)이 부친이다. 묘지는 양주군 진건면 배양2리 어은동에 있는 아버님 묘소 오른쪽 기슭의 건좌에 쌍분(雙墳)으로 모셔져 있고 매년 10월 3일에 세사를 올리고 있다. 5남1녀를 낳아 후손이 많으시다.

큰 아들 귀종(貴宗)은 1484년(成宗 15)에 태어났다.

학문이 높아서 주위의 선비들이 추천해서 사옹원(司甕院)봉사(奉事)가 되고 통훈대부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벼슬을 마치고 1543년(中宗 38)에 돌아가시니 향년 60세였다. 배위는 숙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인데 생원 영손(榮孫)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주군 회천면 고암리(高岩里) 내 고장산(高?:山) 아래 신좌에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 매년 10월 3일에 시향을 올린다.

둘째 아들 숙종(叔宗)은 생졸년월일이 전해진 것이 없다. 관직은 현감(縣監)을 지냈다. 배위는 숙인 전주이씨이고 부친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동기(東耆)이다. 묘지는 선영 아래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미상이다.

셋째 아드님은 휘가 석종(石宗)인데 전해오는 기록이 없고 배위는 경주김씨이다.

묘소도 실전되어서 1910년에 후손 영희(巾英熙)가 충남 연기군 서면 와촌중리에 설단하고 매년 10월 5일에 향사를 올린다.

넷째 아드님은 휘가 신종(愼宗)이고 자는 근지(謹止)이며 호는 유곡(幽谷)이다. 관직은 찰방(察訪)을 지냈다. 배위는 숙인 오천정씨(烏川鄭氏)이며 부친은 박사(博士) 주신(舟臣)이다. 묘지는 참판공 묘 아래 건좌로 모셔져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미상이다.

다섯째 아드님은 휘가 극종(克宗)이고 자는 근원(謹源)인데 1477년(成宗 8년)에 태어났다. 처음 관직은 참봉(參奉)이었는데 승차를 거듭해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까지 올랐다. 1538년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62세였다. 배위는 덕수이씨(德水李氏)이고 그 부친은 도정(都正)을 지낸 정룡(廷龍)이다. 묘지는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덕동(德洞) 자좌에 모셨었는데 실전하고 뜻있는 후손들이 경북 영일군 창주면 병포리 상병곡 형자산(兄子山)에 양위분을 설단하고 매년 10월 상순(上旬)에 세사를 행한다.

사위는 권적(權勣: 安東人)인데 부사(府使)를 지냈고 후에 증영상되었다.

큰 아들 귀종(貴宗)이 아들 세 분과 딸 한 분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휘가 재(在)이다. 1519년(中宗 14)에 태어나서 1546년에 진사가 되고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 1580년 10월 2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은 62세였다. 배위는 공인(恭人) 풍천임씨(豊川任氏)이고 진사 청(淸)의 따님인데 五남四녀의 자녀를 두었다. 묘소는 철원군 어운면 양지리 원장(院場) 자좌에 합폄하였다. 둘째 아들 전(全)은 함종훈도(咸從訓導)를 지내다가 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진주류씨(晋州柳氏)인데 아들 한 분을 낳았다. 묘소는 양주군 회천면 고암리 고장산(高?:山) 아래 능내곡(陵內谷) 경좌에 합폄하였다. 셋째 아들은 우범(友範)인데 기록이 전해오는 것이 없고 배위는 함안조씨(咸安趙氏)이며 아들 한 분을 두었다. 묘지는 양주군 고읍리(古邑里)의 선영에 있다. 사위는 김인(金? 安東人)인데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

둘째 아들 숙종(叔宗)이 아들 두 분을 낳았다. 큰 아들 희문(希文)은 생년은 알 수 없고 1571년에 돌아가셨다. 배위는 진주강씨(晋州姜氏)이고 부친은 재문(載文)이다. 아들 두 분을 두었다. 묘지는 선영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미상이다. 둘째 아들 응규(應奎)는 통덕랑(通德郞)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배위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고 진사 영우(榮雨)의 따님이다.

아들 한 분을 두었고 묘지는 실전되었다.

셋째 아들 석종(石宗)이 아들 한 분을 두었는데 휘가 공(恭)인데 생졸에 대한 기록은 없고 배위는 전주이씨이다. 묘소를 실전해서 후손들이 충남 연기군 서면 와촌중리에 설단하고 매년 10월 5일에 향사를 오린다. 아들 세 분을두었다.

넷째 아들 신종(愼宗)은 아들 네 분을 낳았다. 큰 아들 상(常)은 자가 유항(有恒)이고 관직은 참봉이다. 첫 배위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고 현감을 지낸 익수(益壽)의 따님이다. 계배는 한양조씨(漢陽趙氏)이고 군수를 지낸 덕수(德壽)의 따님이다. 묘지는 학지동(鶴旨洞)이라 하나 찾지 못했다. 아들 두 분을 두었다. 둘째 아드님은 희원(希源)이고 생졸 기록이나 배위, 묘소 등의 기록이 전해오지 않는다. 아들 한 분을 두었다. 셋째 아드님 우건(佑健)은 용인현령(龍仁縣令)을 지냈고 배위는 숙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이다. 묘소는 춘천(春川)의 소가미(所加尾) 자좌에 있다. 아들 두 분을 낳았다. 넷째 아드님은 휘가 이건(邇健)이고 배위는 평양조씨(平壤趙氏)인데 부친은 이득(而得)이다. 묘소는 고곡(古谷)이라 전하나 찾지 못했다. 아들 한 분을 두었다.

다섯째 아들 극종(克宗)은 아들 두 분을 두었다. 큰 아들 간(侃)은 자가 유일(有一)이고 호는 연재(蓮齋)이며 벼슬을 경릉참봉(敬陵參奉)을 지내다가 승진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중종 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서울에서 봉산(蓬山) 오야동(吾也洞)으로 내려왔다. 배위는 숙부인 월성김씨(月城金氏)이고 부친은 좌승지(左承旨)를 지낸 의첨(宜瞻)이다. 묘지는 오야동(吾也洞) 후록(後麓)에 있다 했으나 찾지 못하고 후손들이 힘을 모아 영일군 창주면 병포리의 정자산(亭子山)에 설단하고 매년 10월 상순에 시향을 올린다. 아들 세 분을 두었다. 둘째 아들은 준(俊)인데 공께서는 서울에서 사시다가 기장군(機長郡) 예림동(禮林洞)에 옮겨 살았다. 배위는 풍천임씨(豊川任氏)이다. 묘소는 예림동(禮林洞) 후록(後麓)이라 했으나 찾지 못하고 실전했다. 아들 한 분을 두었다.


참판공파를 빛낸 후손들

1) 안응창(安應昌)
공은 시조공의 18세(世), 회헌 문성공의 14세손으로서 자는 흥숙(興叔)이며, 호는 백암(柏巖), 별호 우졸재(愚拙齋)이시다. 아버지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증우의정(贈右議政) 몽윤(夢尹)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덕순(德淳)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에 태어나 셨으며, 문강공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학문이 깊었다. 의성 현령을 지냈으며 음보로 선산부사(善山府使)에 올랐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림대군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병자호란으로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불모로 있었을 때, 봉림대군(鳳林大君)을 1640∼1643년까지 3년동안 모시었다. 그 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와서별제(瓦署別提)?: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1644년 김화현감(金化縣監), 1655년(효종 6) 의성현령(義城縣令)에 각각 임명되었다. 그 뒤 낙향(落鄕)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하시다가 1680년 (숙종 6)에 별세하시었으며, 후에 한성부부윤(漢城府府尹)으로 증직되시고 순원군(順原君)으로 봉군(封君)되시었다.

공은 추원록(追遠錄) 청교묵담(靑郊墨談) 등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저서로는『백암(柏巖)문집』 5권이 있다.

우리 순흥안씨 후손들은 순원군을 종사의 기틀을 마련하신 훌륭한 선조로 높이 받들어야 할 것이다. 공께서는 350여년 전에 순흥 관향지의 향려단, 추원재의 창건, 영모암의 개수, 추밀공 묘소 정화, 사현정비 건립, 참판공 묘 표석 찬지(撰識), 서파공(西坡公)행장 편찬, 순흥안씨 기해보(효종 10년) 편찬 등 우리 순흥 안씨를 위한 위선사업(爲先事業)에 크게 공헌하신 선조이시다.


2) 안처택(安處宅)
동오선생(桐塢先生)으로 알려지신 분이다.

숙종31년 1705년에 출생, 영조51년 1771년에 졸하셨다.

6세에 천자문을 떼시어 동해명주(東海明珠)라는 칭송을 받으셨다.

훈수(塤?), 지수(??)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셨다. 1732년 두 선생이 돌아가신 후 동오재(桐塢齋)를 짓고 학문에 일념 하셨다. 염방(廉方), 효제(孝悌), 돈목(敦睦), 가례수범(家禮垂範)이 그의 관심이었다.

동오선생문집(桐塢先生文集) 5권 2책 1질이 국립중앙도서관, 각 대학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3) 안중근(安重根)
안공 중근(重根)은 신천 사람이며, 일명 응칠(應七)이다. 서기 1894년에 안태훈(安泰勳)의 토벌군에 종사했고, 서기 1904년 10월 집을 떠나 연태 위해위 상해등지를 유력(遊歷)하며, 동지(同志)를 광구(匡救)하다가 부상(父喪)으로 환국하고,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교를 설립하였다. 서기 1907년에 시베리아로 가서 의용군 1백여명을 모집하여 이범윤(李範允), 최재형(崔在亨)과 해삼위에서 의군을 일으켜 좌악장이 되어 경흥과 회령 등지를 습격한 바 있고, 서기 1910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역 앞에서 적괴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영사 천상 비서관 삼 만철 총재 전중 등을 사살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후, 노국 관헌에 피체 되었다. 왜적에게 인도되어 서기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여순감옥에서 32세로 순국하였다.

서기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4) 안재홍(安在鴻)

안공은 1892년 11월 30일 태어나 1965년 3월 1일 별세하였다. 호는 민세(民世)이며, 경기 평택(平澤) 사람이다. 1912년 일본 동경(東京)에서 거주하던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유학생(朝鮮留學生)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913년 1월 일본 조도전(早稻田) 대학에 재학중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독립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지령에 따라 서울에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고 총무를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9월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월 조선일보(朝鮮日報)의 주필로 재직하고 있을 때 신간회(新幹會)의 총무간사에 피임되어 강령을 작성하고 발표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각 지방의 창립총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강연 등을 실시하면서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7년에는 동삼성(東三省)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을 옹호하기 위한 동맹집행위원회(同盟執行委員會)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7월 조선일보 필화사건(筆禍事件)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금고 8월형을 받았으나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929년 12월 전남 광주(光州)에서 학생운동이 봉기되자 당시의 정치단체인 신간회와 협동하여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있으면서 조선민중대회(朝鮮民衆大會)를 열고 일제의 민족차별적인 처우를 규탄하다가 체포되어 1930년 1월 1일 기소유예 되었다. 1937년 5월 남경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 학생모집 운동으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고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39년 3월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착수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되어 함경남도 홍원(洪原) 경찰서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북 후 미군정청 군정장관, 민의원 의원 등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다가 6.25 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5) 안구련(安龜鍊)

안공 휘 구련(龜鍊)(1867~1941)은 호(號)가 죽남(竹南)이고 문집으로 죽남유고(竹南遺稿)가 있다. 죽남유고(竹南遺稿)는 6권 3책 1질(帙)으로 되어 있고, 경북대, 영남대, 계명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6) 안춘생(安椿生)

안공 휘 안춘생은 1912년 8월 12일 황해도 벽성(碧城)에서 태어나 2011년 1월26일에 돌아가셨다.

선생의 일명은 왕형(王衡)이고, 안중근의사(安重根義士)의 당질로, 1918년 가족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해륜중학(海倫中學)을 졸업하고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자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남경(南京)으로 가서 1936년에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임관되어 중국군 제2사단에 배속되어 대일전에 참전하였다. 서기 1937년 상해 철수작전 시 관통총상을 입었고, 동년 육군대위로 호남성 경비사령부 및 군정보 감호대에서 근무하다가 1940년 한국광복군에 편입 산서성 제2전구 사령장관부에서 적전구에 잠입 활약하였다. 서기 1942년에는 광복군 제2지대 구대장으로, 서기 1944년에는 광복군대령, 주령지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한국국군에 입대하여 사단장과 감찰감 등 군 요직에서 복무하다가 육군중장으로 예편 후, 광복회장과 국회의원, 독립기념관장, 대한노인회장, 순흥안씨대종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서기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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