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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장사를 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연보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 모 조마리아 사이에서 출생.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 김구와의 첫 만남.
•1896년: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1897년: 19세에 천주교에 입교.
•1898년~ 1904년: 천주교 전교 사업. 천주교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불발.
•1905년: 부친 안태훈 사망
•1906년: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
•1907년: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했다.
•1908년: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
•1909년: 단지동맹 결성(동지 11명).
•1909년 10월 26일: 거사
•1910년 2월 14일: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55분 순국.
동양평화론
안중근이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했는데 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의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사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