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알기
ㆍ작성자 안성규
ㆍ작성일 2017-01-20 (금)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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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남(安昌男)-광활(廣闊)한 이상(理想)의 날개
] 안창남(安昌男)-광활(廣闊)한 이상(理想)의 날개|순흥안씨 빛난인물
광덕산 | 등급변경 | 조회 29 |추천 0 |2011.06.21. 14:09 http://cafe.daum.net/p4445/STfh/19 
 
 


 


 


 


 


 

성명(姓名)

 안창남(安昌男)

본관(本貫)

 순흥(順興)

안창남(安昌男)
광활(廣闊)한 이상(理想)의 날개
안창남(安昌男)이 우리나라 항공계의 선구적 위치를 가지기까지에는 그나름의 꿈과 이상과 고독이 있었다. 식민지 통치하의 소년으로 성장하면서 그가 보아야 했던 패배와 절망, 어머니의 죽음, 계모의 학대, 이와같은 모든 것의 질곡(桎梏)에서 벗어나는 길이 바로 하늘에 대한 동경이었을 것이다. 하늘은 꿈과 통하고 이상을 펼치는 희망의 상징이다. 또한 현실의 괴로움을 초극할 수 있는 항로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1901년 1월 29일 서울의 평동(平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상준(安尙俊)은 목사로 알려지고 있거니와 생활 역시 안정된 중상류층이었다. 누이 안소저(安小姐).소년기의 안창남이 보았던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처절한 모습이었다.
그는 다섯 살 때에 을사조약을 겪게 되었으며 열 살 되던해(1910)에는 경술국치가 조인되었다. 이러한 나라의 기울어짐은 바꾸어 말하면 그의 성년기가 어둡게 채색되어 감을 뜻하는 것과 같다.
안창남 조종사 

안창남(1901년 3월 19일 - 1930년 4월 2일)은 한국 최초의 비행기 조종사이다.

서울 출생. 미동(渼洞)소학교를 졸업하고 휘문(徽文)고보를 중퇴한 뒤 미국인 비행사 스미스의 시범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자동차학교[大阪自動車學校]를 거쳐 아카바네 비행기제작소[赤羽飛行機製作所]에서 비행기 제조법을 배운 뒤 오쿠리 비행학교[小栗飛行學校]에서 조종술을 배우고 졸업 후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1921년 비행사 시험에 합격했고 이 해 도쿄[東京]·오사카[大阪] 사이의 우편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고국방문 비행을 하여 대환영을 받았다. 후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이상재(李商在) 등의 주선으로 상하이[上海]로 가, 옌시산[閻錫山] 장군 휘하의 타이위안[太原] 비행학교 교관이 되었으며, 중국의 혁명전선에 참가했다가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대한독립공명단이라는 비밀 항일조직에서 독립군 비행 학교 건설을 위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父) 안상준(安尙俊)ㅡㅡ>누이 안소저(安小姐) 안창남(安昌男)
 
 
< 출생 >

1901년 3월 19일 안창남은 서울시 종로구 평동 20번지(당시의 한성 서북촌 평동)에서 구한국 시대 중추원 의관을 지낸 부친 안상준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순흥 안씨 안창남의 집은 패물상을 하면서 경기도 장단 등지에 농토를 소유하고 있어 사는데 큰 어려움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안창남은 부친 안상준이 40세가 넘어 낳은 첫 아들이라 가족들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하였다.

그러나, 안창남이 네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면서 안창남의 시련은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집에 들어온 계모의 질투로 인해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사랑은 점점 멀어져 갔고, 이후 어린 안창남은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혼자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어려서부터 숙성하여 온갖 재롱을 다 부리고 욕심이 대단하여 무엇이든지 많은 것을 주지 않으면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 안창남은 8살 때 집 부근에 있는 사립화동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구한말, 교육이 구국의 길이라고 하여 생긴 여느 학교와 비슷하였는데 학생 수도 얼마 되지 않아 가족적인 분위기의 이 학교에서 소년 안창남은 학과 공부보다는 장난이나 놀이에 더 관심이 가지며 성장하였다.
12세가 되던 1912년 4월, 안창남은 미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1896년 5월에 개교한 오랜 역사를 가진 학교이며 규모도 화동학교에 비교하면 훨씬 큰 학교였다. 한학년이 50명이나 되어 안창남에게는 많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계모의 구박이 점점 심해졌으나 이에 크게 개의치 않고 안창남은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학적부에 의하면 안창남은 50명 정원에서 중간정도의 성적이었다.
당시 안창남은 무척 개구장이여서 친구와 장난치기 하는 것과 높은 나무에 올라 아래로 내려 뛰기 하는 것을 즐겨하였다.
안창남이 태어난 평동 20번지는 현재 종로구 강북 삼성병원 뒷편에 있으며, 그 당시 서울의 인구가 20만명 정도에 지나지 않아 집 주위가 요즈음처럼 번잡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서대문이 그대로 있었으며 전차가 서대문을 통과하여 지나다니고 있었고 성벽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집은 새문밖이라고 하였지만 성문과는 불과 2백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 이라서 동네 친구들과는 성안 시내도 함께 놀러 다니고는 하였다.


< 비행사로의 꿈을 키우다 >

안창남은 1915년 3월에 미동학교를 졸업하고 그 다음달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종로구 계동에 소재하는 규모가 비교적 큰 학교로 훌륭한 시설과 교사진이 있는 명문학교 중의 하나였다.
당시 이 학교에는 주시경 선생도 교사로 재직하고 있어서 안창남도 주시경으로부터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한편,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후 안창남에게 가장 큰 벗이 되었던 네 살위의 누나가 천안으로 시집가게 되어 안창남의 외로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집안의 재산관리도 계모가 주도하여 학비를 마련하는데도 어려움이 컸고, 게다가 계모와 아버지간의 불화도 끊이지 않아 주변의 환경은 안창남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홧병이 원인이 되었던지 갑자기 병석에 들게 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안창남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안창남에게 큰 희망과 꿈을 준 것은 하늘을 나르는 비행사가 되겠다는 그의 포부였다. 1915년 학교의 자퇴이후에도 안창남은 이러한 꿈을 접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17년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가 비행 쇼를 벌이기 위해 용산 연병장에 나타났다. 서울 상공에 펼치는 그의 곡예 비행을 보며 안창남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고, 자신도 반드시 저와 같은 비행사가 되어 상공을 날아보겠다는 결심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포부가 전혀 실현불가능하다고 본 주위에서는 그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한 방법으로 결혼을 강요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안창남은 혼인이 비행사가 되는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이 결혼에 반대 하였으나 억지로 결혼하게 되었다. 아마도 주위의 사람들은 비행사를 꿈꾸는 그라 하더라도 결혼을 하게되면 평범한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위의 노력도 안창남에게는 별 소득이 없었다. 법적으로 상속자이면서도 아버지의 유산을 한푼 받지 못한 안창남은 마침 계모가 집판돈 3천원이 있는 것을 알고 이를 몰래 가지고 일본으로 향했다.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현해탄을 건너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오사카에 도착하였다. 오사카에서 비행학교 입학 문제를 알아보았으나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안창남은 우선 자동차 운전을 배우기로 하였다.
오사카 서구에 있는 자동차학교 전수과에 들어가서 발동기의 원리 등과 운전술을 약 2개월간 배운 안창남은 비행학교로의 입학을 뒤로 미루고 일단 서울로 돌아 왔다.
서울에 돌아온 안창남은 계모가 자신과 상의없이 수천원 짜리 밭을 모두 방매해 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창남은 구입자에게 그 재산의 소유주가 자신임을 알리고 자신에게 반환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었다. 결국 안창남은 구입자를 상대로 계모가 판 재산에 대해 반환을 청구하는 소송을 법원에 제기하였다.
그러는 한편 안창남은 민모씨와 함께 황금정에 자동차부를 설치하고 택시 사업을 함께 하였다. 소송의 추이를 지켜 볼 겸 비행학교에 다닐 학자금도 마련하기 위해서였는데 당시 택시 운전사는 하얀 명주 목도리를 걸치고 양복 정장을 입는 최고의 인기 직종이었다. 수입도 좋았으며 일반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만약 안창남이 자동차 운전사 지위에 만족하였다면 그 뒤로도 얼마든지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을 정도로 자동차운전수는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 일본에서의 성공 >

계모가 판매하였던 토지에 대한 소송에서 승소한 안창남은 잃었던 재산을 찾는데 성공하여 약 5천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시의 돈가치로는 적지 않은 액수였다. 자금이 마련된 안창남은 다시 1919년 8월 이후 토교로 건너가서 아카바네 비행기 제작소에 들어가 기체부에서 비행기제작에 대해 6개월간 공부하였다.
이곳은 일본군용 비행기의 용구를 공급하는 곳으로 상당히 규모가 큰 공장이었다. 이곳에서의 수업은 안창남에게 장래 비행사가 되어 고장난 부분 등을 직접 진단하고 수리할 만큼의 실력을 갖추게 하였다.
자동차학교에서는 발동기 원리와 운전술을 공부하고, 비행기 제작소에서는 기체의 구조와 원리를 배운 안창남은 비행사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오쿠리 비행학교에 1920년 8월에 입학하게 된다. 이 학교는 토쿄 스사키 해변에 사설 비행장을 설치하고 입학생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는 곳으로 교장인 오쿠리는 미국 카지쓰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돌아온 민간항공계의 유명한 인물이었다.
당시 이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술을 습득한다는 것은 의지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금의 확보가 우선 되어야 하였다. 즉, 이 비행학교의 입학금은 1백여원이나 되었고, 입학후에도 실습을 통해 비행술을 배우는데 드는 비용은 1분간에 2원이라는 거금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돈이 없이는 아무리 비행가로서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난 뒤에 필요한 것이 지원생의 비행가적 자질이었다. 오쿠리 비행학교의 입교 테스트는 면접과 실기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요시 되었던 것이 공중 비행중의 지원생 태도였다.
즉, 교장 선생은 지원생과 함께 비행기에 탄 후 높이 공중을 날아 한바퀴 돈 후 착륙하게 되는데 이때 동승하였던 지원자의 상태를 보고 비행가가 될만한가를 판단하였다. 재판에서 승소하여 찾은 5천여원이라는 돈은 따라서 안창남에게 무척 소중한 자금이었다.
비행가가 되기 위한 교육생으로 공부를 시작한 안창남은 우선 비행장 근처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매일 날만 좋으면 공중 연습을 통해 비행술을 익혔다. 그리고, 비가 오거나 악천후일 경우에는 실내에서 조종술에 대한 경험이나 신지식을 토론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맑은 날의 비행 연습은 비행장 내에서만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그것도 4백미터나 5백미터 밖에는 비행하지 못하였 다.
이 학교에 입학한 안창남은 곧 그의 뛰어난 비행 자질로 인하여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해 10월 15일 오쿠리 교장 선생과 함께 아사이버션 광고지 20만매를 토쿄 시내에 뿌리게 되었는데, 일본인 연구생들을 제치고 그가 조수로 함께 동승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기쁨이었다.
좀처럼 단독 비행을 시키지 않고 있던 비행학교는 안창남에게는 입학 후 두달이 못되어 허용되었다. 이러한 그의 놀라운 비행가적 자질은 그를 3개월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하였다. 수업년한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학생들 경우에는 1년이나 2년에도 졸업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한 연구생도 적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이와 같은 안창남의 빠른 성장은 그가 가진 비행가적 재능이 탁월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1921년 4월부터 안창남은 오쿠리 비행학교의 직원과 교수들의 권유로 이 학교의 조교수가 되어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비행학교의 강의와 관계없이 민족의식이 강했던 안창남은 강의 도중 일본 식민지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곤 하여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일본 경찰이 강제 구인을 획책하였으므로 초등학교 2년 선배인 방정환의 토쿄 속소에 숨어 이를 모면하였다고 한다.
한편, 비행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안창남에게 비행가로서 또 한번의 명성을 드높이는 기회가 왔다. 그해 4월 25일 일본 항공국에서는 비행에 관한 법규를 제정하여 비행 면허 제도를 도입하여 시험을 통하여 비행사 면허를 지급하였던 것이다. 5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계속된 이 시험에 안창남을 비롯하여 일본 비행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민간 비행가 17인이 응시하였는데 일본의 일류 비행가들이 줄줄이 낙방의 고배를 맛보는 가운데 안창남은 일본인 후지나와라는 사람과 함께 제일 먼저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로써 안창남의 이름은 '조선출신 일류 비행사'라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후 안창남의 비행술은 날로 발전하였다. 1922년 오쿠리비행학교 교수로 있을때 3등 비행사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곡승비행(곡예비행)을 빈번하게 시행하여 당시 경시청과 항공국에서 잦은 경고를 받은 적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 이듬해 안창남은 11월 6일 일본제국비행협회가 주최한 토쿄-오사카 간을 왕복하는 우편 비행대회에 참가하여 또 다시 우수상을 차지함으로써 그의 천재적인 비행술을 인정받게 되었다. 더욱이 그가 탔던 비행기가 창고속에 버려두었던 폐기나 다름없던 것이었고, 이를 고쳐 비행대회에 출전하였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비행과 관련하여 안창남의 재능이 천재적임을 다시 한번 입증하였다.


< 조국하늘을 날다 >

비행사안창남이라는 이름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당시 가장 권위를 자랑하는 월간 잡지 '개벽' 1920년 12월호에 그에 관한 글이 게재되고 난 후였다.
표지 한가운데에 '조선비행가 안창남' 이라는 글씨가 쓰여진 이 잡지의 내용에는 안창남의 사진 3장과 함께 5페이지에 걸친 도쿄 주재 기자의 안창남에 대한 근황이 실려있었다.
그 기자는 글 머리에서 안창남을 이렇게 소개한다.

근래(近來) 우리에게 여러가지로 반가운 소식(消息)이 만흔 중(中) 특(特)히 해외각지(海外各地)에서 비행술(飛行術)을 연구(硏究)하는 우리 청년(靑年)이 만히 잇다는 것은 반가운 중(中)에도 가장 반갑고 깃븐일이다. 세계문명(世界文明)의 에떨어진 우리가 남가티 살려는 새일에 손대여 온갓 건설(建設)에 힘쓰는 지금(只今) 남의 곳 남의 몸에 끠어 비행술(飛行術)을 연구(硏究)하는 우리 형제(兄弟)가 잇슴을 알때에 그 얼마나 깃븐일이냐 더구나 비행사상(飛行思想)이 세계(世界) 누구보다도 먼저 건설(建設)하엿고도 지금(至今)껏 일대(一臺)의 비행기(飛行機) 일인(一人)의 비행가(飛行家)도 가지지못한 우리로서.
미국(米國)에도 우리 비행연구자(飛行硏究者)가 잇고 노(露), 혹(惑)은 지나지방(支那地方)에도 우리 비행가(飛行家)가 잇다고하나 그 방면(方面)읫 일을 말할 경우(境遇)에 잇지 못한 우리는 구태여 그것을 알코저 안커니와 십월(十月)십오일(十五日) 오후(午後)에 일본동경시가양국교부근(日本東京市街兩國橋附近)의 공중(空中)에 비행기(飛行機) 일대(一臺)가 놉히 떠서 버선 광고지(廣告紙)를 뿌리고 갓는데 아아 반가울손 그 비행기(飛行機) 우에는 조선청년(朝鮮靑年)이 타고 잇섯다 찬란(燦爛)한 동경(東京)의 시가(市街) 바람잔잔한 강호(江戶)의 공중(空中)에 따스한 가을볏을 쪼이며 놉게 날은 기(機)는 오구리 이십팔호(二十八號), 기상(機上)엣 청년(靑年)은 이십세(二十歲)의 홍안(紅顔)으로 그 이름은 안창남(安昌男)이엇다

또한, 잡지 '개벽'에는 안창남이 직접 집필한 '오쿠리비행장에서'라는 글이 함께 실려 있었는데 그 곳에서의 생활을 설명한 이 글은 많은 일반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 내용중에는 자신이 익힌 비행술을 조국의 하늘에서 직접 선보이고 싶다는 말을 덧붙여 사람들을 설레게 하였다.
이후 안창남의 모국방문비행은 사람들의 관심사로 부각되어 여러 노력이 기울여졌다. 즉, 1921년 11월, 안창남 후원회를 조직하여 비행기 구입을 위한 2만원을 모금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으며, 다음해 5월에는 '고국방문대비행', '재동경 안창남 김용서 양씨 장거', '5월 중에는 긔어히 조선을 방문'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결국 이 모금 운동이나 방문 비행이 불발로 끝나(김용서는 안창남의 오쿠리비행학교 제자) 1921년 비행사 면허를 취득한 이후에도 안창남의 모국방문비행은 쉽게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안창남은 모국방문비행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안창남은 드디어 동아일보와 함께 그 꿈을 성사시켜 그가 그토록 바라던 우리나라 상공에서 자신의 비행기술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모국방문비행에 대한 꿈이 현실로 되는 순간이었다.
우선 고국방문 비행에 앞서 10월 말에는 박영효를 위원장으로 하는 안창남군 고국방문 비행 후원회가 발족했고, 거의 매일 같이 '13도 유지여! 회원되소서' 라는 사고를 신문에 실었다.
그 광고에 의하면, 회비 2원 이상을 내면 통상회원, 10원 이상을 내면 특별회원, 50원 이상을 내면 명예회원으로 모신다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사는 신문 지면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이 행사를 홍보하였다. 사설만도 5·6회 게재 하였고, 행사 전후로 하여 지면 한면 전체를 안창남에 대해 보도한 것이 여러번 되었다.
안창남이 결국 조국방문비행을 위하여 조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은 온 장안을 들끓게 만들었다.
그리고, 안창남이 그의 비행기 '금강호'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온 날부터 부산, 남대문역, 후원회 등등 그가 가는 곳마다 엄청난 환영 인파가 모였으며, 안창남의 인기는 가히 열광적이었다.
드디어 1920년 12월 10일, 수 많은 관중앞에서 역사적인 안창남의 고국방문 비행이 거행되었다. 첫 번째 비행은 15분간 체공하여 비행하였으니 짧은 시간이었지만 관중들의 감동은 대단하였다. 두 번째의 비행은 한층 고난도의 곡예 비행을 하며 15분간 계속되어 열광적인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이 날의 날씨는 매우 추워서 발동기가 작동을 하지 않을 정도였고, 게다가 비행기 자체도 성능면에서 매우 허술하여 안창남에게는 매우 악조건이었다.
하지만, '험악한 기후는 동포의 뜨거운 정성으로 극복하고 허술한 기계는 능란한 기술로 이겨서 도저히 성공하기 어려운 두차례의 모험비행을 대성공으로 마쳤다' 라고 할 만큼 꿈에도 그리던 조국방문비행을 성공리에 마치기 위하여 안창남은 혼신의 힘을 다한 끝에 극복할 수 있었다.


< 중국에서의 활동 >

고국방문 비행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것과는 달리 안창남비행사후원회에서 전개한 모금활동은 부진하여 안창남에게 새로운 비행기를 마련해 줄 수는 없었다.
국내에서 비행학교를 내어 후진을 양성하고 싶다는 소망이 불가능해지자 안창남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비행학교의 강사로 활동하는 한편, 비행대회에 출전하기도 하여 국내에서 발행되는 신문에는 그의 소식이 간간히 전해졌다.
그러한 와중에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일어난 조선인 대학살 사건으로 안창남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국내 신문을 통하여 전달되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였다. 그러나, 보름 뒤 무사하다는 소식과 함께 그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음이 판명되어 사람들은 안도하였다.
그후, 일등 비행사가 된 그가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항일 군벌인 오패부 군벌에 합류한다는 소문이 일간신문에 실린 후 적화방지단 등 일본내의 극우테러단체들로부터 테러 위협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안창남은 1924년 10월에 귀국하여 종로구 수송동 113번지의 자택에 돌아온다. 12월 말경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안창남은 이를 숨기기 위하여 매일 음주와 사냥으로 소일하며 기회를 엿보게 된다.
드디어 안창남은 1925년 1월경, 일본경찰의 감시가 소홀할 틈을 타고 동지인 김동철과 함께 만주를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안창남은 제일 먼저 상해임시 정부 등과 접촉하여 비행사의 양성을 통해 항공독립군을 구성하겠다는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의 상황은 안창남의 구상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안창남은 다시 북경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동맹이란 조직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 안창남은 중국 군벌들의 전쟁에 참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곽송령 군벌 등이 그것인데, 당시 중국은 각지에 군벌이 형성되어 군벌간의 내전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1926년, 안창남은 여운형의 소개로 염석산 군벌의 항공 중장으로 초빙되어 그의 군대에서 복무하게 된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염석산은 안창남의 일본에서의 활동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일등비행사 안창남에 대하여 파격적인 대우를 하였다.
그러나, 안창남은 염석산의 휘하에서 산서항공학교의 교장으로 연습생을 육성하면서도, 조국의 독립운동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항공중장이라는 높은 직급을 활용하여, 그해 그는 한국인 동지들을 규합하여 비밀 항일무장투쟁단체인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안창남의 항공학교 한국인 제자들과 타이위안에 사는 교포들이 주 구성원이었고, 상해나 북경 등지에도 독립운동가들이 찾아와 함께 활동하였다.
이들 공명단원들의 가장 큰 목표는 비행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여기서 배출되는 비행사를 통해 조국독립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의 실현을 위해 공명단 단원들은 국내로 진입하여 총독부의 우편자동차를 습격하는 거사를 벌이기도 하지만, 일경에게 모두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항일비밀결사조직인 공명단의 활동은 안창남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종식되어 버렸다.
1930년 4월 2일 이날은 염석산이 대장군이 되어 장개석 국민당 정부에 선전포고를 한 다음날이었다. 안창남은 오후 4시에 타이위안 천지단에 있는 산서항공학교 앞에서 뜻하지 않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자신에게 불어닥쳤던 좌절 및 고독과 쉼없이 싸우면서 마침내 그의 꿈을 실현시켰던 안창남은 조선 최초로 조국의 하늘을 날았던 비행사로서 뿐만아니라 우리나라 조국독립운동사에도 길이 빛날 생애를 살다 갔다. 특히, 당시 일제의 압박에 신음하던 식민지 민중들에게 선보인 안창남의 모습은 '떳다 보아라 안창남비행기' 라는 노래가 널리 퍼져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시대의 영웅이었다.
너무도 짧게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안창남에 대해 국내의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기사와 함께 사설로 애도를 표하였다. '조선의 상공을 정복한 최초의 용사 안창남씨가 중국에서 세상을 떠나' 등의 제목으로 보도된 기사는 그를 기억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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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안찬(安璨)-1派13世참판공파-禦侮將軍 초지만호(草芝萬戶), 안성규 2017-01-20 495
40 안계송(安繼宋)1派12世-참판공파 안성규 2017-01-20 389
39 11세손 장사랑계 시조 안성규 2017-01-20 695
38 안진(安進)1派10世 안성규 2017-01-20 281
37 안종신(安從信)-참판공파(參判公派)派祖-1派9世-경력(經歷) 가선.. 안성규 2017-01-20 799
36 안창남(安昌男)-광활(廣闊)한 이상(理想)의 날개 안성규 2017-01-20 1998
35 <안창호 `세계인권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안성규 2017-01-20 639
34 독립운동가 민세(民世)안재홍(安在鴻) 안성규 2017-01-20 553
33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선생| 안성규 2017-01-20 649
32 안중근 모친조마리아 안성규 2017-01-20 108
31 안중근의사의 생전의 머물던 家* 안성규 2017-01-20 116
30 묘지가 없는 고독한 영웅 안중근 3형제 안성규 2017-01-20 259
29 안 중근 의사 ( 도마 ) 안성규 2017-01-20 203
28 분파에 대한 설명 안성규 2017-01-20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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