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알기
ㆍ작성자 안성규
ㆍ작성일 2016-12-26 (월)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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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노비촌(安氏奴婢村)과 선농단(先農壇) 선농탕(先農湯)
스크랩] 순흥안씨 가문에서 거느리던 노비촌(安氏奴婢村)과 선농탕(先農湯)설렁탕|순흥안씨 빛난인물
광덕산 | 등급변경 | 조회 49 |추천 0 |2011.06.21. 13:50 http://cafe.daum.net/p4445/STfh/8 

순흥안씨 가문에서 거느리던 노비촌(安氏奴婢村)과 선농탕(先農湯)

 

안씨노비촌(安氏奴婢村)과 선농단(先農壇) 선농탕(先農湯)

 

이태조(李太祖)는 한양으로 천도 하자마자 정치이념으로 삼은 유교를 기리는 뜻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공자를 비롯한 사현(四賢-안자 顔子. 증자 曾子, 자사 子思, 맹자 孟子)과 십철(十哲) 육현(六賢-주자 周子, 정백자 程伯子, 정숙자 程淑子, 소자 邵子, 장자 張子, 주자 朱子)을 모시는 성균관을 지금의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세웠다.

성균관(成均館)은 우리나라 유학의 총본산(總本山)이요, 대학의 뿌리다.

일제(日帝)때 이곳에 명륜학원(明倫學院)이란 유학원(儒學院)을 두었는데 이 학원 이름이 연유가 되어 1936년

명륜동(明倫洞)이라는 동명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성균관이 있다 하여 관동(館洞)으로 불렸다. 태조 6년의 일이다.

지금 명륜동1~2가 그리고 성균관이 자리잡고 있는 3가 일대의 통칭이다. 이 관동을 관(館)사람 마을이라고 했는데 성균관의 각종(各種) 제사(祭事)를 맡아보는 사람들이 주로 산다고 얻은 별칭이다.

관(館) 사람들이 예외 없이 고려 때 굴지의 유학자(儒學者) 안향(安珦)선조의 노비(奴婢)들 후손이라 하여 안씨노비촌(安氏奴婢村)이라고도 불렀다.                                      

 

고려 시대의 유맥(儒脈)을 이었던 안향(安珦)선조의 후손(後孫)들도 한양으로 이사를 했고 성균관이 건립되자 우리 순흥안씨 가문에서 거느리던 1백여명의 노비(奴婢)들을 이 성균관에 바쳐 제사 일을 돌보게 했던 것이다.

관동(館洞)에 살면서 번창하여 한 때 이들은 1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관동은 대대로 물리는 순흥안씨 노비문서(奴婢文書) 없이는 들어가서 살 수가 없었다.

비록 노비 신분이지만 성현을 모시는 지엄한 일을 한다 하여 긍지도 대단하여 시골 양반은 종이라 하여 '해라' 못하고 '하게' '하오' 하는 존댓말을 써야 했다.

또한 시골에서 올라온 성균관 선비들이 거의가 이 관(館) 사람들 집에 기숙(寄宿)하였기로 이 학생들이 대과(大科-과거)에 급제, 역대(歷代)의 조정을 주름 잡았는지라 그 연줄도 있고 해서 위세도 대단했다.

 

어느 집은 역대 정승 판서 몇을 하숙시켰느니, 당상(堂上)을 몇 십 명 배출했느니 하여 명예로 삼았으며 또 그 명예로 하숙비를 올려 받기도 했던 것이다.

옛날에도 도의(道義)에 어긋난 정치를 하면 이 성균관 서생(書生)들이 글 읽던 자리를 걷고 왕궁문(王宮門) 앞에 나아가 집단 데모를 곧잘 했는데 이를 '자리를 걷는다' 하여 권당(捲堂)이라 했다.

도의정치를 부르짖던 선비의 우상 조광조(趙光祖)가 옥에 갇히자 성균관 서생들이 일제히 시위를 했는데 이때 오라에 엮인 서생들이 옥(獄)을 채우고 종각(鍾閣) 다락까지 채웠으며 이 갇힌 하숙생의 밥을 나르느라 관동 노비촌이 텅텅 비었다 했다.

이 관동노비를 구심(求心)시키는 행사가 바로 그들 조상의 상전(上典)인 안향(安珦)선조의 제사이다.

바로 9월 12일이 상전 제삿날이면 각기 쌀과 베를 추렴하고 성균관에도 돈과 쌀을 보조하여 성대하게 제를 지냈으며, 이날 영남·호남의 선비들까지도 멀리서 참여했으니 대단한 대동제(大同祭)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는 제사정치(祭事政治)를 했다 할 만큼 크고 작은 제사가 많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1973.5.28일자>

선농단(先農壇)은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제사 지내던 곳으로 전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자리에 있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선농(先農)의 기원은 신라시대까지 올라가는데,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태조 이래 역대 왕들은 이곳에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선농제(先農祭)를 지냈다.

성종 7년(1476)에는 이곳에 관경대(觀耕臺)도 쌓았다.

선농단은 지금 사방 4m의 돌단만이 남아 있으며, 1973년 1월 26일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선농제(先農祭)를 지낼 때 그 축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께서는 처음으로 농사를 일어키어,

우리 백성의 양식을 풍족케 하셨네.

이 제사를 받으시고, 풍년을 이루게 하소서.]

 

선농제를 올린 뒤에는 선농단 동남쪽에 마련된 적전(籍田)에서 왕이 친히 밭을 갊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사일의 소중함을 알리고 권농(勸農)에 힘썼다.

왕이 적전을 몸소 경작하는 것을 친경(親耕)이라 하였다.

때로는 해당 관원에게 대신하게 하는 대경(代耕)도 있었으나,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친경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친경하던 곳은 선농단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으로 그 면적은 100이랑이었다.

친경 때에는 경적사(耕籍司), 적전령(籍田令), 사복시정(司僕寺正), 봉상시정(奉常寺正)과 경기도 각 고을 현령들이 쟁기질을 도왔다.

즉 왕이 쟁기를 잡으면 사복시정이 소의 고삐를 잡아 밭을 가는데, 다섯 발자국을 밀고 가면 근시가 쟁기를 이어 받고, 왕은 인근에 설치한 관경대(觀耕臺)로 가서 쉰다.

이어서 종친과 재상들이 일곱 발자국을 밀고, 판서와 대간들이 아홉 발자국을 밀고서 물러나면 봉상시 판관이 서민들을 거느리고 나머지 100이랑의 밭을 간다.

이윽고 의례가 끝나면 노인과 유생·기생들이 풍년가를 부르는 가운데 봉상시정이 곡물의 씨앗을 파종하고, 판관·주부들이 흙을 덮어 뒷마무리를 한다.

이 때 파종하는 씨앗은 9곡(九穀)이라 하여 벼·피·기장·수수·귀리·밀·콩·팥을 고루 갖추게 했다.

이렇게 하여 친경을 끝내고 궁에 돌아오면 왕은 주연을 베풀어 참여했던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상을 준다.

때로는 특별사면을 하여 죄인을 풀어주기도 했다.

친경제도는 조선시대 내내 시행되었는데, 융희 3년(1909)의 친경행사를 마지막으로 일제 때 폐지되었다.

이와 같이 친경은 형식적이고 상징적이었을 뿐 실제로 경작에 보탬이 되는 밭갈이는 아니었다.

왕이 몸소 밭갈이를 한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왕이 농업을 매우 중히 여기고 있으니, 백성들 역시 힘을 다하여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려는 이념적 행사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선농단>

 

이 선농단에서의 행사와 관련하여 설렁탕의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선농단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소와 돼지를 잡아서 통째로 놓고 지냈는데, 제사가 끝나면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소는 잘라서 국을 끓이고 돼지는 삶아 썰어서 놓는다.

이 때 쇠고기와 쇠뼈, 쇠머리를 함께 넣어서 끓인 국을 선농탕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가면서 음이 변하여 설렁탕이 되었다.

본래 왕이 거둥하면 문무백관이 따르게 마련이고 왕의 근처에 일반 백성들은 얼씬도 하지 못하는데,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이날만큼은 왕이 백성과 똑 같이 쟁기도 매고 하니까 백성들이 왕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또 왕도 농사짓는 백성들을 위로하는 뜻에서 백성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했으니까 이날만큼은 선농단을 중심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다.

모여든 사람 중 60세 이상 되는 노인들을 우선으로 선농탕을 먹였다.

이 때 소를 잡아서 국을 끓이는 일을 관(館)사람들이 맡아서 했다.

관사람들이란 관동(館洞)에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관동은 오늘날 명륜동 3가 일대로 성균관(成均館) 근처에 있다 하여 붙여졌다.

 

제사의 제수 장만이며 진행이며 모든 치다꺼리를 제례(祭禮)에 투철한 이들 관동노비들에게 담당시켰다.

제사 때마다 신명(神明)에게 올리는 희생물인 짐승 잡는 일도 관동의 노비촌에만 주어진 특혜였다.

제사에는 신(神)에게 공식(共食)하는 뜻에서 희생된 짐승으로 국을 끓여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골고루 나누어 먹음으로서 신인일체(神人一體)를 다지는 절차가 따르게 마련이다.

농사신(農事神)인 선농(先農)에게 풍년을 빌며 바친 소(牛)의 희생 음식이 선농탕(先農湯)이다.

이 선농탕을 직접 끓인 것도 관동 노비들이었다.

이 제사 음식을 여염을 상대로 팔기 시작한 것도 관동 노비들이었다.

곧 선농탕의 원조는 관동이며 한말(韓末)까지만 해도 선농탕은 관동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특수 음식이었다.

한말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노비가 해방되기 전까지만 해도 고려 시대부터 이어 내린 순흥안씨 가문의 노비가 적잖이 살았으며 이 관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그들의 솜씨인 선농탕이 특수 음식으로 보편화 돼 갔던 것이다.

관사람들은 끓인 국, 즉 선농탕을 동네에서 빌려온 뚝배기에 퍼 담아 나눠 주었는데, 반찬을 할만한 김치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파를 듬성듬성 썰어서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춰 내 놓았다.

오늘날 설렁탕에 파를 썰어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것은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후 관동사람들은 관동 일대에서도 선농탕을 끓여서 팔았는데, 나중에는 쇠머리를 삶아서 혀 밑이나 쇠머릿고기, 허파 같은 것도 넣게 되었다.

이리하여 선농탕은 서울의 명물이 되어 갔고 서민의 음식이 된 것이다.

 

 
우리 순흥안씨와 설렁탕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태조 이래 역대 왕들은 이곳에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선농제(先農祭)를 지냈다. 왕들은 풍년을 기원하고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위하여 선농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선농단에서의 행사와 관련하여 설렁탕의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선농단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소와 돼지를 잡아서 통째로 놓고 지냈는데, 제사가 끝나면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소는 잘라서 국을 끓이고 돼지는 삶아 썰어서 놓는다. 이 때 쇠고기와 쇠뼈, 쇠머리를 함께 넣어서 끓인 국을 선농탕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가면서 음이 변하여 설렁탕이 되었다.
본래 왕이 거둥하면 문무백관이 따르게 마련이고 왕의 근처에 일반 백성들은 얼씬도 하지 못하는데,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이날 만큼은 왕이 백성과 똑 같이 쟁기도 메고 하니까 백성들이 왕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또 왕도 농사 짓는 백성들을 위로하는 뜻에서 백성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했으니까 이날 만큼은 선농단을 중심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다. 모여든 사람 중 60세 이상 되는 노인들을 우선으로 선농탕을 먹였다.

이 때 소를 잡아서 국을 끓이는 일을 관(館)사람들이 맡아서 했다. 관사람들이란 관동(館洞)에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관동은 오늘날 명륜동 3가 일대로 성균관(成均館) 근처에 있다 하여 붙여졌다. 성균관 제사의 제수 장만에 필요한 희생(犧牲)은 관사람들에게 주어진 특혜였다. 관사람의 유래는 고려말의 유학자 회헌(晦軒) 안향(安珦)이 노비 100명을 개성의 성균관에 바치면서 비롯되었는데, 이들의 일부가 한양의 성균관 주변에 자리잡으면서 자손이 번창하여 수천명이 이 마을에 살면서 안씨노비촌(安氏奴婢村)이라 하였다. 안씨의 노비자손이 번창하자 이 마을에는 순흥안씨의 노비문서 없이는 들어가서 살 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이들은 비록 노비신분이었지만 성현을 모신다는 긍지가 대단하였다. 시골에서 올라온 유생들도 신분상으로는 노비인 이들에게 「하오」 「하게」 등의 존대를 썼을 정도였다. 국법(國法)에도 소 잡는 것을 오로지 관사람들에게 맡겨주고, 성균관의 이예(吏隸)들도 관사람들을 시켰다. 관사람들은 끓인 국, 즉 선농탕을 동네에서 빌려온 뚝배기에 퍼 담아 나눠 주었는데, 반찬을 할만한 김치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파를 듬성듬성 썰어서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춰 내 놓았다.
오늘날 설렁탕에 파를 썰어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것은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후 관동사람들은 관동 일대에서도 선농탕을 끓여서 팔았는데, 나중에는 쇠머리를 삶아서 혀 밑이나 쇠머릿고기, 허파 같은 것도 넣게 되었다. 이리하여 선농탕은 서울의 명물이 되어 갔고 서민의 음식이 된 것이다
 
 


 


 

 
채소장수 '안감' 이름딴 용두동 안암천

설화기행, 서울속으로        

서울 한 가운데는 한강이 흐른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한강이 한가운데가 아니라 사실은 남쪽 경계선이었다. 조선시대, 이른바 강북의 한가운데는 청계천(淸溪川)이 흐른다. 얼마나 이름이 좋은가, 청, 계, 천. 이 청계천에 모래가 쌓여서 좁아지고 얕아지니까 가끔 준설 작업을 해서 창계천을 넓혔기에 열 개(開)자 내 천(川)자, 우리가 흔히 냇물을 개천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청계천의 멋을 갖다가 쓴 것이다.
그 청계천으로 들어가는 작은 냇물이 허다한데, 그 하나가 서울 성북동에서 시작하여서 얕은 중심지로 내려오는 냇물, 그러니까 안암동이요, 신설동을 적시고 흐르는 냇물이 안암천(安岩川)인데, 원래 이름은 안감(安甘)내였다
        
안감이라는 사람 이름을 따서 안감내라고 하고 거기에 있는 큰 다리를 안감내다리라고 하니, 그 용두동을 적시고 가는 안감내는 또한 어찌된 연고냐? 궁금하구나. 옛날에 지금 안암동 쪽에서 채소를 길러 서울 장안에 팔러 다니는 총각이 하나 있었으니, 성씨는 좋아서 순흥 안씨(順興 安氏)다마는 실상은 그저 채소 장수에 불과한 청년이었다.
"음, 오늘은 장사가 잘 되겠지. 좋은 임자를 만나서 잘 팔 것이야, 잘하면 그 집에 가서 해장을 얻어먹겠지"
그날그날 이런 소박한 꿈을 가지고 사는 안감이었다. 이름이 안감(安甘). 평안하고 달콤하구나.
"자, 살 테니까 우리집으로 지고가요."
이런 여자의 말을 듣고서 그 양반집에 채소짐을 지어다 주고, 때로는 장작도 패 주고 쌓아 주고, 아침도 얻어먹고, 그러다가 그 여자의 호의를 입어서 그만 단골이 되고, 물론 그 여자는 양반집 여종이었지만 말이다. 안감은 그 날따라 돈을 좀 만졌다. 아침 식전, 해를 등에 받고서 동대문에 들어가면 식전 행보인지라 시장하였다. 안감은 비록 아침은 못 얻어먹었지만 돈은 제대로 받아서 콧노래가 나왔다.
"오랜만에 복만이네 설렁탕집에 한번 들어볼까? 한잔 걸칠까?"
그는 소문이 자자한 복만이네 설렁탕집에 들어섰다. 지금은 주택가가 되었지만 이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자리가 선농단(先農壇)이다. 임금님이 봄에 농사를 격려하는 뜻으로 나오셔서 쟁기질을 하고 선농단에서 만든 간단한 탕국을 들었다고 해서 선농탕(先農湯)이 되었다고 하는데 발음하기 쉽게 후에 설렁탕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안암동 쪽에 복만이라는 사람이 설렁탕을 유명하게 만들어서 팔았다는 것이다.
선농단 자리가 안암동 자리, 구체적으로는 용두동이다. 그래서 이제 채소 장수 안감이 그 곳에 들어가서 잘 시켜먹고 있는데, 자기 옆에 웬 단저고리 바람으로 그러니까 제대로 복장도 갖추지 못한 노인 하나가 열심히 설렁탕을 들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게 자시고 있었다. 누가 보든 음식을 달게 들면 보기에 좋은 법, 하물며 나이가 드신 저런 어른의 식욕을 어이 칭송하지 아니하랴? 반대로 음식을 께적께적 먹고 고마운 줄 모르고 밥투정이나 하고 있으면 아이나 어른이나 영감이나 얼마나 미운지 모른다. 하여튼 이 노인은 식성이 좋았다. 보기에 좋았다. 아니 그 노인은 기품도 있어 보였다. 그런데 어찌 이 새벽같이 여기 나와서 해장국을 드시는 것일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차, 내가 돈을 안 가지고 나왔구려. 내가 속히 집에 갔다 와서 밥값을 드리리다, 주인장."
노인이 이렇게 말을 하였다. 그러자 그 주막 주인이라는 자가
"이 영감 웃기네. 내가 언제 영감을 보았다고 밥값을 떼일 짓을 한다는 말이오? 어서 돈을 내놔요."
"미안하고. 내가 사정이 있어서 급히 나오는 바람에, 미처 돈을 못 가지고 왔구려."
"영감은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나는 돈 받는 사정뿐이오. 어서 돈을 내놔요. "
"우리집 하인들이 어찌나 여기 설렁탕이 맛있다고 하는지, 급히 나오는 바람에 지금 돈이 없다니까요."
"그러면 그 옷이라도 잡혀요."
"이 옷을, 그러면 나는 알몸뚱이인데 ……."
"그것을 내가 알 것이 무어요? 어서 옷을 벗어요!"
        
이런 난감한 일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곁에서 먹고 있던 안감은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주인장, 밥값이 얼마요? 내가 대신 내 드리리다."이리하여서 이 안감은 그날 채소를 팔아서 번 돈을 선뜻 내 놓았다. 그러니까 그 노인은 감지덕지 하였다. 둘은 같이 나왔다."총각, 이름이 무엇이고 사는 곳이 어디요? 내가 신세를 갚겠소."
"에잇, 무슨 말씀을요. 저도 어르신 같은 부모가 계시고, 간혹 돈 없이 시장하시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저는 오늘 장사가 쏠쏠하여서 어르신 밥값을 낼 만하니 어서 가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이름 밝히고 주소 밝히면 좋은 일이 아니지요. 어서 가시지요."
"음, 사실은 우리집 하인들이 자꾸 이야기를 하는 것이야.

동대문 밖 선농단 근처에 설렁탕집이 맛이 있다고. 그래서 내가 그냥 간단한 옷차림으로 나왔다가 이리 봉변을 당하던 차, 그만 총각한테 신세를 졌구려."
"원, 별말씀을. 그럼 어서 가 보시지요."
"아참, 총각. 언제 시간이 나면 종로 어디어디에 사는 나를 찾아오게. 채소가 안 팔리면 언제든지 우리집에 가지고 오오."
이러면서 헤어졌다. 안감은 돈은 좀 줄어들었지만 기분은 참 좋았다.
얼마 후 그날은 이상하게도 정반대였으니 채소가 도통 팔리지 아니한지라 궁여지책으로 그 종로 산다는 어른집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가보니까 웬걸, 이것이 무엇인가? 으리으리한 기와집, 솟을 대문이 있는 집이었다. 집 앞에서 안감은 망설였다.
"아이구, 이런 집에 사시나?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아이구, 나 같은 채소 장수는 저 집 대문만 보아도 후들후들 그냥 떨리네."
그런데 그 집 하인인가가 나와서 소리를 질렀다.
"너는 누군데 우리 대감집을 넘보느냐? 혼나고 싶은가 보구나!"
"아니오. 그저 동대문 밖 안암방(安岩坊)에서 사는데, 어쩌다가……."
"어쩌다가? 가만 있자, 당신이 얼마 전에 설렁탕집에서 노인 하나 대접을 했던……."
"뭐 대접이라고까지 할 것이야 있겠습니까마는 물으니까 그런다고 하겠습니다."
"음, 어서 들어갑시다. 우리 대감님이 기다리십니다. 날마다."
이리하여서 안감은 그 으리으리한 대감집에 들어가서 융숭하게 대접을 받았다.
"사실은 내가 무슨 대감이네. 그때는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래 자넨 소원이 무엇인가? 말해보게……."
"벼슬인가?"
"아닙니다, 저는 못 배웠습니다."
"재산인가?"
"아닙니다, 제 몸 하나로 그럭저럭 먹고 삽니다."
"장가들기인가?"
"아닙니다, 나타날 여자가 있겠지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인가?"
"예, 우리 동네에 비가 오면 건너기가 힘이 드는 냇물에 다리를 하나 놓고 싶습니다. 그러면 저도 좋고 우리 부모도 좋고 동네 사람도 좋고 성 안 사람도 좋고 다 좋으니까요."
"음, 그 냇물은 이제부터 네 이름을 따서 안감내(安甘川)라고 하고 이번에 놓은 다리는 안감내다리라고 해라!"
이리하여 지금의 안암교(安岩橋)가 안감내 다리로 이름지어진 것이다. 이름도 좋은 청계천(淸溪川). 거기에 깃든 청량심(淸凉心). 편안하고 달콤한 인심좋은 안감천(安甘川). 그런 서울을 만들어 가자꾸나.






지금의 명륜동 성균관대학교는 조선시대 국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成均館)이 있던 곳
이었는데(지금도 일부 건물이 있음) 성균관은 우리나라 유학(儒學)의 본산이요 大學의 뿌리였다.

일제때 이곳에 명륜학원이란 儒學院(유학원)을 두었었는데 이 학원이름에서 유래되어
명륜동이란 洞名을 얻게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성균관이 있다하여 관동(館洞)으로 불렀고
성균관에서 치러지는 각종 제사를 맡는 사람들이 주로 살았다.

그 관(館)사람들은 예외없이 고려말의 유명한 유학자 안유(安裕)의 노비들 후손이었기에
이곳을 안씨노비촌(安氏奴婢村)으로 부르기도 했었다.

고려가 망하고 한양에 천도하자 태조 이성계는 정치이념을 儒敎(유교)로 정하고 孔子를
모시는 성균관을 이곳에 지었는데 고려朝의 儒脈(유맥)을 이었던 安裕(안유)의 후손도 한양으로
옮겨왔다가 성균관이 완성되자 安씨 가문의 奴婢(노비) 100 여명을 이 성균관에 바쳐 제사일을
돌보게 했다.

이들 安裕가문의 노비들은 관동에 모여 살면서 번창하여 한때 이들은 1천명여명에 이르렀으며
관동은 대대로 물려내려오는 순흥 安氏 노비문서없이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비록 노비신분이었지만 성현을 모시는 지엄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하여 긍지도 대단했고
양반이라 할지라도 이들에게 '해라' 소리는 못하고 '하게' 또는 '하오' 정도로 말을 높혔다.

시골에서 올라온 성균관의 선비들이 거진 이 館사람들집에 기숙하였기에 이 하숙생들이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역대의 조정을 주름잡았는지라 그 연줄도 있고해서 위세도 대단했다.

어느집은 역대 정승판서 몇을 하숙시켰느니 당상(堂上)을 몇십명을 배출했느니 하여 명예로
삼았으며 또 그 명예의 값으로 하숙비를 올려받기도 했으니 요즘 말로 하자면 로열티를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옛날에도 도의에 어긋난 정치를 하면 이 성균관 유생들이 글읽던 자리를 박차고 나와 宮門으로
달려가 집단농성을 자주 하곤 했는데 中宗때 선비의 표상이었던 조광조(趙光朝)가 옥에 갇히자
성균관 유생들이 일제히 경복궁문을 뚫고 들어가 시위를 벌였는데 이때 오라줄에 묶인 유생들이
종각(鐘閣)(보신각을 말함) 다락까지 채웠으며 이 옥에 갇힌 유생들이 먹을 식사를 나르느라
관동 노비촌이 텅텅 비었다한다.

이 관동노비를 구심시키는 행사가 바로 그들 조상의 상전인 安裕(안유)의 제사였는데
9월 20일 상전의 제삿날이면 제각기 쌀과 베를 추렴하고 성균관에서도 돈과 쌀을 보조하여
성대하게 祭(제)를 지냈으며 멀리 영남, 호남의 선비들까지 참여했다고 하니 그 엄청난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조선왕조는 제사정치를 했다할만큼 크고 작은 제사가 많았다.

그 제사의 제수 장만이며 진행이며 모든 치닥거리를 제례에 밝은 관동노비들에게 맡겼고
제사상에 오르는 희생물인 짐승잡는 일도 이 관동노비촌에 주어진 특혜였다.
제사에는 神과 같이 음식을 먹는다는 뜻에서 희생된 짐승으로 국을 끓여 제사에 참여한
사람 모두 골고루 나누어 먹음으로써 神人一體를 다지는 절차가 따르게 마련인데, 農事神인
先農에게 풍년을 빌며 바친 소(牛)를 제사후에 끓여 나누어 먹은 것이 바로 '설렁탕'의 효시였다

이 설렁탕(선농탕)을 끓이는 것도 관동노비들만이 할 수 있었는데 나중엔 이 제사음식을
일반인들을 상대로 팔기도 했었지만 韓末까지만 해도 설렁탕은 관동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특수음식이었다.

韓末 갑오개혁으로 노비가 해방되기전까지만 해도 고려시대부터 이어내려온 순흥 安氏
家門의 노비가 명륜동에 많이 살았으며 이 관사람들이 흩어지면서 그들만의 솜씨인 선농탕이
특수음식에서 보통음식이 되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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