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알기
ㆍ작성자 안성규
ㆍ작성일 2016-12-26 (월)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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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安珦) 문하(門下)의 육군자(六君子)

안향(安珦) 문하(門下)의 육군자(六君子)

 
▲ 안향 문하의 六君子
성리학의 본향인 송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를 송조육현(宋朝六賢)이라고 부른다. 이는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소옹, 주희(주자)를 지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성공 안향의 문하에 이름난 여섯 학자를 육군자라고 해 추앙해 마지않았다. 육군자국재 권보, 역동 우탁, 동암 이전, 매운당 이조년, 이재 백이정, 덕재 신천 등을 일컫는다. 고려 말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익재 이제현이 국재 권보의 사위며 백이정의 문인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안향의 학문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안향이 세상을 떠날 때 백이정, 권보 등 문인들에게 “나는 학문이 그대들보다 못하였다.
그대들은 연상이나 동년이라고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내가 세상을 떠나면 우탁을 나와 같이 스승으로 모시고 섬기라”고 당부했다. 이에 당시 백이정의 문인이던 익재 이제현과 치암 박충좌 등 24인과 권보의 문인이던 가정 이곡, 담암 백문보, 졸옹 최해 등 19인이 모두 역동 우탁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해 학문적 계보가 이어졌다.
 
 
우탁(禹倬) 
 
   시대: 고려 
   생몰년도: 1263 - 1342(원종 4 - 충혜왕복 3) 
   본관: 단양(丹陽) 
   자: 천장(天章), 탁보(卓甫, 卓夫) 
   호: 백운(白雲)/단암(丹巖)/역동(易東) 
   시호: 문희(文僖) 
   활동분야: 유학자 
 
   1263(원종 4)∼1342(충혜왕 복위 3). 고려 말 정주학 수용 초기의 유학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세상에서‘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시조 현(玄)의 7대 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천규(天珪)의 아들이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이 무렵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 이름하는 신사(神祠)가 있어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받들고 있었으며, 자주 제사지내고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하였는데,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는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하여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程朱學)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하여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특히 정이(程?)가 주석한《역경》의〈정전 程傳〉은 처음 들어왔을 때 아는 이가 없었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만에 터득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고려사》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주 뛰어난 역학자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시조 2수와 몇 편의 시가전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조에 와서 이황(李滉)의 발의로 1570년(선조 3)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훼철당하였다가 1966년 복원되었다. 구계서원(龜溪書院)은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華海師全, 東國遺史, 新增東國輿地勝覽, 易東 禹倬先生의 學問과 人品(李完栽, 安東文化 3, 安東學會, 1973) 易東 禹倬先生 思想의 硏究(吳錫源, 安東文化 5, 安東學會, 1984)〕
 

 
권보(權溥)
 
    시대: 고려 
    생몰년: 1262 - 1346(원종 3 - 충목왕 2) 
    본관: 안동(安東) 
    자: 제만(齊滿) 
    호: 국재(菊齋) 
    시호: 문정(文正) 
    활동분야: 문신, 학자 

 
   1262(원종 3)∼1346(충목왕 2). 고려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초명은 영(永), 자는 제만(齊滿), 호는 국재(菊齋). 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단(?)이며 어머니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노연(盧演)의 딸이다. 15세에 진사가 되고 1279년(충렬왕 5) 18세로 급제, 이듬해 전시(殿試)를 거쳐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에 보임되었다. 국자학유(國子學諭)를 거쳐, 박사(博士)로 올랐다가 우정언(右正言)에 이르렀으며 여러 번 옮겨 첨의사인(僉議舍人)이 되었다. 1298년 1월 충선왕이 즉위하여 사림원(詞林院)을 설치, 개혁을 시도할 때 시강학사(侍講學士)가 되었는데, 박전지(朴全之)·오한경(吳漢卿)·이진(李?)과 함께 4학사의 일원으로 왕의 자문에 응하였다. 이해 8월, 충선왕이 원나라에 소환되고 충렬왕이 복위하자 조간(趙簡)·김태현(金台鉉)·김우(金祐)와 함께 전선(銓選)을 맡기도 했다. 여러 번 옮겨 우부승지 판예빈시사(右副承旨判禮賓寺事)에 오르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올랐는데, 밀직사사로 있으면서 성절사(聖節使)의 임무를 띠고 원나라에 다녀왔고 또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예부시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를 거쳤으며,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자 찬성사에 올랐고 이어 정승이 되었으며 판총부사(判摠部事)를 겸하여, 왕명에 따라 무선(武選)을 전주(銓注)하였다. 그 뒤 수문전대제학 영도첨의사사사(修文殿大提學領都僉議使司事)가 더해지고 부원군이 진봉되었으며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호(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號)가 더하여졌다. 충숙왕 이후 미묘하였던 대원관계에서 국로(國老)의 자격으로 여러 차례 어려운 정국을 해결하였다. 학술분야에 있어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역사학에 있어서는 민지(閔漬)를 도와 《세대편년절요 世代編年節要》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태조 이래의 실록을 약찬하였다. 《사서집주 四書集註》의 간행을 건의하여 간행됨으로써 성리학의 전파에 상당한 공헌을 했고, 《은대집 銀臺集》 20권을 주석했으며, 아들 준(準), 사위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역대 효자 64명의 행적을 기린 《효행록》을 편찬하였다. 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의 다섯 왕을 섬기면서 벼슬은 8품의 승사랑(承事郎)에서 시작하여 정1품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고, 85세를 누렸으니 당대의 부귀로 견줄 자가 없었다. 아들은 준·종정(宗頂)·고(皐)·후(煦)·겸(謙)이고, 사위는 안유충(安惟忠)·이제현·순정대군 도(順正大君璹)·회안대군 순(淮安大君珣)인데 아들 다섯, 사위 넷이 모두 봉군되어 9개 봉군집안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전형(銓衡)을 맡으면서 가산을 늘렸다는 비난도 받았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權溥墓誌銘〕
 

 
이전(李轉)
 
   시대: 고려 
   생몰년: 1244 - 1321(고종 31 - 충숙왕 8) 
   본관: 경주(慶州) 
   자: 온고(溫古) 
   호: 동암(東菴) 
   시호: 문정(文定) 
   활동분야: 문신 
 
   1244(고종 31)∼1321(충숙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방연(芳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菴).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손으로 제현(齊賢)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가에 박통하고 시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사록(廣州司錄)을 거쳐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충렬왕이 시부(詩賦)로써 친히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았는데 제2등으로 뽑혔다.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이 되었다가 안동부사로 나가 민폐를 없애고 학교를 일으키는 데 공헌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군부총랑(軍部憁郎)이 되고, 1297년(충렬왕 23)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사림원학사(詞林院學士) 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를 거쳐 대사성 밀직승지가 되었으며, 1303년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07년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한 것이 채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된 뒤 상의도첨의사사(商議都僉議司事)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13년에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고 임해군(臨海君)에 봉하여졌으며, 1315년에는 과거의 고시관이 되어 진사를 뽑았다. 1320년에는 아들 제현이 과거의 고시관이 되어 새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수(壽)를 칭송하자 전왕인 충선왕이 은병(銀甁) 200개와 쌀 200석을 하사하였다. 체구가 크고 마음이 너그러웠으나 아들 제현의 세력에 의지하여 남의 노비를 탈취한 것이 많아 호소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학문과 시와 술로 소요하였다. 충주 도통사(道統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동암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이조년(李兆年)  

   시대: 고려 
   생몰년: 1269 - 1343(원종 10 - 충혜왕복 4) 
   본관: 성주(星州) 
   자: 원로(元老) 
   호: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시호: 문열(文烈) 
   활동분야: 문신 
 
  1269(원종 10)∼1343(충혜왕 복위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농서군공( 西郡公) 장경(長庚)의 아들이다. 1294년(충렬왕 20) 향공진사(鄕貢進士)로 문과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에 보직되고, 이어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비서랑(秘書郎) 등을 지냈다. 1306년 비서승(秘書丞)으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을 때 왕유소(王惟紹)·송방영(宋邦英) 등이 충선왕을 모함하여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 전(瑞興侯琠)으로 충렬왕의 후계를 삼으려 획책하다가 충선왕의 세력이 커지자 처벌되었는데, 이때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단지 충렬왕을 보필하고 있었으나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그 뒤 귀양에서 풀려 나와 13년 간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한번도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지 않았다. 당시 충숙왕은 5년 간이나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양왕 고(瀋陽王暠)가 왕위 찬탈을 음모하자 홀로 원나라에 들어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이러한 음모를 분쇄하였다. 1325년(충숙왕 12)왕이 귀국하자 감찰장령(監察掌令)으로 발탁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郎)으로 관동지방을 안무(按撫)하였다. 1327년 충숙왕이 원도(元都)에 있을 때 왕을 도운 공로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이등공신(二等功臣)이 되었으며, 이어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하였다. 이때 충숙왕은 심왕당(瀋王黨)의 끊임없는 모략으로 왕위를 심왕에게 선양(禪讓)하려 하였으나 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여 이를 저지시켰다.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장령(掌令)이 되었고, 그 뒤 여러 번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내왕하였다.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그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하였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의 음탕함을 여러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듬해에 사직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에 녹권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으며, 이런 엄격한 성품 때문에 꺼림을 받았다. 역임한 관직에서 많은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되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新增東國輿地勝覽〕

 
 
 
백이정(白 正) 
 
   시대: 고려 
   생몰년: 1247 - 1323(고종 34 - 충숙왕 10) 
   본관: 남포(藍浦) 
   자: 약헌(若軒) 
   호: 이재(이齋) 
   시호: 문헌(文憲) 
   활동분야: 유학자 
 
   1247(고종 34)∼1323(충숙왕 10). 고려 충선왕 때의 유학자. 본관은 남포(藍浦).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이齋).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문절(文節)의 아들이며 안향(安珦)의 문인이다. 1275년(충렬왕 1) 문과에 급제, 충선왕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겸하였고 뒤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298년 원(元)이 사신을 보내어 세자를 왕으로 삼고, 8월에 왕을 불러가자 충선왕을 따라 원의 연경(燕京)에서 10년간 머물러 있었는데, 그동안 주로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였고, 귀국할 때 정주(程朱)의 성리서적과 주자의 《가례 家禮》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뒤 후진양성에 힘써서, 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이곡(李穀)·이인복(李仁復)·백문보(白文寶) 등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으며, 도학과 예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하여 크게 일가를 이룬 이는 백이정이라 할 수 있다. 안향과 백이정의 학통은 이제현에게 전승되었고, 이제현은 이색(李穡)에게, 이색은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으로 이어졌다. 선조 때 김제남(金悌男)·최기남(崔起南) 등이 송경(宋京)에 서원을 세워 안향·권보(權溥)와 함께 배향하기로 경기사림(京畿士林)과 논의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였지만, 남포의 신안원(新安院), 충주의 도통사(道統祠), 진주의 도통사(道通祠), 남해의 난곡사(蘭谷祠)에서 향사하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평리 양각산(羊角山)에 있으며, 신도비 등이 남아 있다. 유고로는 〈연거시 燕居詩〉·〈영당요 詠唐堯〉·〈한벽루 寒碧樓〉·〈여홍애집구 與洪厓集句〉 등의 시구가 전해지고 있다. 

 
 

신천(辛蕆) 
 
   시대: 고려 
   생몰년: ? - 1339(충숙왕복 8) 
   본관: 영산(靈山) 
   호: 덕재(德齋) 
   시호: 응청(凝淸) 
   활동분야: 문신 
 
   ?∼1339(충숙왕 복위 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산(靈山). 호는 덕재(德齋).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314년(충숙왕 1) 3월에 선부직랑(選部直郎)이 되었다. 안향(安珦)의 문인으로 1319년 6월에 총랑(摠郎)으로 있으면서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극력 주청하여 스승을 문묘(文廟)에 종사하게 하였다. 1326년에 지공거가 되어 이달중(李達中) 등을 취하였으며, 그 뒤 1339년 12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죽었다. 작품으로 안동의 영호루(暎湖樓), 청주의 공북루(拱北樓), 통천의 총석정(叢石亭)을 읊은 시가 있으며, 삼척팔경의 하나인〈와수목교 臥水木橋〉와 평해의 경치를 읊은〈요곽장천여고리 繞郭長川如故里〉등의 시가전하고 있다. 시호는 응청(凝淸)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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