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알기
ㆍ작성자 안성규
ㆍ작성일 2016-12-26 (월)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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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順興安氏)가 훌륭한 가문인 이유)
순흥안씨(順興安氏)가 훌륭한 가문인 이유)
순흥안씨(順興安氏)가 훌륭한 가문인 이유!(2)

주세붕(周世鵬)선생은 순흥안씨 가문을 충효우제청풍지풍(忠孝友悌淸風之豊)의 가문이라고 했다.

나라에 충성을 다해왔고 충절(忠節)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선조들이 많았으며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도 검소한 생활과 선정(善政)을 베풀어 양반이 지배하던 당시의 계급사회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으로 백성과 더불어 사는 생활태도로 일관했고 청렴하게 살아 오셨다.

또한 민족개화(民族改化)와 독립운동에 앞장선 선조가 많았다. 정말 자랑스런 가문이다.


1. 충효절의(忠孝節義)의 애국의 가문

유교의 근본은 충(忠)과 효(孝)인 것이다.

우리 순흥안씨 가문은 타의 가문에 못지않게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해왔고
충절(忠節)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선조님들이 너무나 많았다.

소수서원을 창건한 주세붕(周世鵬-당시 풍기군수)선생은 소수서원을 창건한 2년후인 1546년
우리 선조들이 사시던 마을을 찾아 그 마을의 한 우물옆에 사현정비(四賢井碑)를 세웠다.

그 우물은 안석(安碩-문경공) 선조와 그의 아들 안축(安軸-문정공), 안보(安輔-문경공), 안집(安輯-제주공)의 4부자가 잡수시던 우물로서
이우물물을 드시고 4부자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현인(賢人)이 되셨다는 말을 들은 주세붕 군수는 이를 확인하고 그곳에 비석을 세웠는데
(현재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그 비문에 우리 순흥안씨가문을 충효우제청풍지풍(忠孝友悌淸風之豊)의 가문이라고 썼다.

우리가문에서는 고려조와 이조를 통하여 충신 55분 그리고 효자효부(孝子孝婦)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배출 되었다.

▶ 고려의 충신(忠臣) 안우(8세 安祐-문충공)선조는 고려때 안주군민만호부(安州郡民萬戶府)의 도만호(都萬戶)로 있을때
4만에 달하는 홍건적이 침범했을때 서경(西京)까지 적의 손에 들어갈 위급한 상태에서 죽기로 싸워 적을 격퇴시킨 큰 공을 세움으로서
추충절의정난공신오성군(推忠節義定亂功臣 鰲城君)를 제수 받은 영광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또 20만 대군을 몰아 쳐들어와 죽기로 싸워 이를 물리치는 큰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평소 공의 전공을 시시하던 역신 김용(金鏞)일파에게 전승을 왕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문에 들어서자마자 무참히도 피살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사후에는 나라에서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이조에 와서 이태조(李太祖)는 숭위전(崇位殿-고려 태종 등을 모신 사당)을 짓고
이에 고려 충신으로 복지겸(卜智謙), 안우(安祐), 정몽주(鄭夢周) 등 16인을 배향했는데
고려 500년동안의 충신 16명중 우리 안우선조가 들어 있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

▶ 임진왜란때도 관직에 있었거나 또는 재야에 있으면서 종군(從軍)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선조가 많았고
또한 의병(義兵)을 일으켜 목숨을 나라에 바친 선조들도 참으로 많았다.

예를 들면 안신갑(安信甲-초계군수), 안위(安衛-거제현감), 안진(安璡-절충장군), 안의손(安義孫-의령부사), 안치화(安致和-아산현감),
안황(安璜-선전관 의병) 안홍국(安弘國-보성군수)선조 등 그 외에도 많은 선조들이 왜적과 싸우면서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

특히 보성군수로 있던 안홍국(安弘國-충현공)선조는 이순신장군의 발탁으로 그 휘하에서 늘 선봉장으로 전투에 참여 했고 이순신장군을 대리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임진왜란하면 이순신장군이 너무나도 유명하여 우리 선조의 이 장렬한 죽음 애국의 충절을 잘 모르고 있다.

정유재란때에 왜적과 싸우다가 전함(戰艦)위에서 장렬한 전사를 하셨으나 당시 총지휘관이었던 원균이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다.

{원균은 사실대로 보고하기 싫어서 다만[온종일 싸우다 죽다]라고만 보고하였다. 이렇게 시장(諡狀-전황보고 문서)에 쓰여져 있다.}

후의 기록인 조선왕조 실록(현종 8년)에 의하면 [정유년에 보성 군수(寶城郡守)에 제수되어 통영 중군(統營中軍)이 되어 주사(舟師)를 총괄하여
다스리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앞장서서 왜적에게 대항하였다.

6월에 왜적과 안골포(安骨浦)에서 싸워 배 한 척의 군졸을 거느리고 수십 척의 왜선을 격파하고는, 마침내 탄환에 맞아 죽으니, 당시 나이가 43세였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충열이 이순신과 다름이 없었으며 그의 사적(事蹟)이 《황명통기(皇明通紀)-명나라 황실의 기록》 및
《종신록(從信錄)-명나라 종군기록》·《만력동정기(萬曆東征紀)-명나라 군사기록》에 실려 있다.

호남의 기사(奇士) 임준(林峻)이 안홍국을 위하여 전을 짓기를 ‘외로운 군사로 곧장 돌진하여 죽음을 맹세코 힘껏 싸워서 여러 차례 왜적의 배를 격파하였다.

적탄에 맞아서는 활에다 화살을 잰 채 뱃전에 기대어 죽었는데, 노기가 발발하여 적은 그가 죽었는지조차 몰라서 배를 보전하여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하였다.]

오히려 명나라 기록인 《황명통기(皇明通紀)》 및 《종신록(從信錄)》·《만력동정기(萬曆東征紀)》의 기록을 보면
[왜선 수십척이 여러번 바다를 건너와 부산 가덕 안골포에 숨어 있다가 조총을 비오듯 쏘아 안홍국(安弘國)을 죽이고서야 마음 놓고 양산,
옹천 등지까지 전쟁지역을 넓혔다.]라고 했으니 6,7년동안 싸움에 우리나라 장병의 죽음을 허다히 보아온 명나라 사람들이 특별하게 죽은
안홍국장군의 전황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으니 이로써 안홍국선조가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이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추증되고 숙종(肅宗) 17년에는 충현공(忠顯公)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순천의 충민사(忠愍祠)와 보성의 정충사(旌忠祠)에 배향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훌륭하신 선조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자손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 경남 함안에는 삼강비(三綱碑)가 서있다. 이 삼강비의 내용은 나라에 충성을 다한 충(忠)과 부모에게 효도를 다한
효(孝)와 그리고 정절을 지킨 렬(烈)에 대한 내용을 담은 비(碑)이다.

이 비는 안유(15세 安瑜) 선조가(家)에 대한 것으로 아버님(瑜) 상을 마치고 임란 이듬해 덕유산으로 숙부(安璜)를 찾아가다가
정진(鼎津) 나루터에서 왜적을 만나 어머님이 정절(貞節)을 위하여 자진(自盡)하였다.

몽량(夢良 15세), 몽윤(夢尹 11세), 몽구(夢丘 7세) 3형제는 덕유산에 가서 의병에 참여시켜줄 것을 숙부님에게 간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홍의(紅衣-곽재우)장군에게 가서 그들의 뜻을 고하였더니 그들의 충(忠)과 의(義)를 장하게 여기고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에 기록했다.

이들 3형제는 매번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정유재란때 큰형은 창녕 화왕산(火旺山)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이들은 어머님의 원수를 갚았으며 왕업(王業)을 도와 중흥(中興)을 시켰으므로 충(忠), 효(孝), 열(烈)을 다했기에 삼강비(三綱碑)를 세워
후세인에게 귀감(龜鑑)을 삼았다.


2. 애민정신(애민정신)에 투철한 청렴한 가문

▶ 안향(4세 安向-문성공)선조께서 주자학을 도입하신 것은 유학을 진흥시켜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것이고 바른 정치를 하려 한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자는데 있었다.

당시 고려는 불교국가에다 미신까지 믿는 시대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원성이 많아 안향선조께서는 무교(巫敎)의 타파에 앞장서셨으며
우민상세(憂民傷世) 하면서 선정을 베푸셨다.

선조께서 상주판관(尙州判官-군수)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회는 전화(戰禍)로 인하여 생계를 잃고 불교와 무교의 신앙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유독, 상주고을은 일찍부터 무교가 성행하여
그때 합천(陜川)지방으로부터 그곳까지 돌아다니면서 신(神)을 빙자하여 주민을 괴롭히는 무당 세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피해가 막심하였으나 어느 고을에서도 뒤탈이 있을까봐 겁이나서 이들을 다스르지 못했다.

그 무당들은 산신령의 딸이라 자칭하며 마치 사람의 길흉(길흉)을 하늘에서 들리는 것 같게 하여 사람들을 현옥시켰다.

안향선조는 이것은 입술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뱃속으로부터 소리를 내는 복화술(複話術)임을 간파하고 이들을 옥에 가두었다.
그들은 [이제 상주고을은 망한다. 3년동안 한 해가 들것이다. 괴질이 번진다....]등 별별 협박 공갈을 했으나 안향선조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되었다.

어느 고을에서도 뒤탈이 무서워 해결하지 못한 것을 젊은 판관(군수) 안향선조가 해결한 것이다.

이것은 오작 백성을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도 무당에 현옥되는 사람이 있는데 근 750년전에 미신을 타파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안축(6세 安軸-문정공)선조는 존무사(存撫使)로서 강원도에 파견되었을 때 가시는 곳마다 정성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위문하고 무마 하였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이르러서 시(詩)를 남겼다.

후에 그때의 시만을 모아 발간한 것이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시집(詩集)인데
그 시에는 선조의 애민사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 시집의 서문(序文)은 정당문학 이제현(李齊賢) 선생이 썼는데 그 일부를 보면 [풍월을 읖조린것과
사물의 형상을 그대로 옮겨 그린것이 진실로 옛사람에 양보할 것이 없도록 훌륭하다.....감동하고 분개하여 지은 작품들은
풍속의 마땅함과 마땅하지 아니함과 백성의 기쁨과 근심등에 관계되는 것이 열에 아홉이다. 이것을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몹시 슬프게 한다.
아! 누가 안축(安軸) 이전에 이렇게 읊어던가!....] 이렇게 쓰여있다.

▶ 안종원(7세 安宗源)선조는 고려말 요승(妖僧) 신돈(辛旽)이 정권을 잡고 권세를 부릴때 공을 아끼는 분이 신돈을 찾아가 인사를 하면
더 좋은 자리로 승진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신돈에게 찾아가는 것을 거절하였다. 결국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좌천이 되었다.

선조께서는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올바르게 사시는 성품이라 강릉에 계시는 동안 은혜로운 정책을 펴서
백성을 친자식 같이 사랑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러나 강릉부사 마저도 그만두게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자 강릉의 백성들은 공의 은덕을 잊을 수 없어 살아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당(祠堂)을 짓고 화상(畵像)을 걸어 놓고 흠모했다.

이것이 만고(萬古)에 예가 드믄 생사당(生祠堂)인 것으로 공의 정성과 청렴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 사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 안현(14세 安玹-문희공)선조는 경상감사로 계실 때 순흥안씨 족보를 처음 간행하셨으며
좌의정(左議政)까지 지내신 청백리(淸白吏)이시다.

공께서는 세왕조(三代王朝)에 걸쳐서 올바르게 나라일을 보셨고 백성을 위한 치적이 많았고
또한 청렴한 관직 생활로 타의 모범이 되셨으며 세 번이나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지금의 서울시 삼청동(三淸洞)은 세 번이나 청백리로 선출된 분이 사셔서 삼청동이라고 동명(洞名)이 생겼다는 설(說)도 있으며
국무총리 공관내의 바위(岩)에는 안씨지기(安氏之基)라고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그곳이 안현선조가 사시던 터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생사당(生祠堂), 청백리(淸白吏), 삼청동(三淸洞)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우리는 남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깨끗한 생활로 남과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봉사(奉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안순(9세 安純-정숙공)선조는 이조 세종대왕때 8년간이나 호조판서(戶曹判書)를 하신 분으로써
이조실록세종조(李朝實錄世宗條)에 무려 202번이나 공의 정책건의, 행적등이 실려있다.

공의 애민(愛民)과 관련된 일화로 사헌잡단(司憲雜端)으로 재직하던 때에 궁녀 한명이 죄를 범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태조는 당시 대사헌이던 조박(趙璞)에게 그 궁녀를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조박은 공에게 곧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공은 “사헌부는 형관이 아니며,
더구나 그 사람의 죄가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처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조박은 명령대로 할 것을 그에게 요구하였으나, “사람은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극형에 처함은 불가하니
우선 유사(有司)에 명하여 먼저 심문부터 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여 그 궁녀는 무죄(無罪)로 밝혀져 죽음을 면했다.

이러한 일화가 암시하듯이 공은 강직한 인물이었으며 하찮은 인명 하나를 소홀히 하지 않고 신중을 기한 선조의 애민의 뜻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공이 53세때(1423년)에는 함경도에 큰 흉년(凶年)이 들자 세종대왕은 판서급에 있는 사람을 보내어 구호코자 했는데
적당한 사람이 없어 상중인데도 불구하고 공을 특별히 기용하여 함경도에 가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셨으며
67세(1437년)때에는 충청도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도 도순문진휼사(都巡問賑恤使)가 되어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 하였다.

공은 비록 종(奴-노예)이라도 질병이나 상사(喪事)가 나면 힘을 기울여 돕는 자비심의 소유자였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이외에도 많은 선조님들이 청렴한 생활로써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다 같이 더불어 사는 데 본을 보인 선조들이 많다.
우리들은 이 선조님들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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