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알기
ㆍ작성자 안성규
ㆍ작성일 2016-12-30 (금)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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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派8世안원(安瑗) 경질공(景質公)

안원(安瑗) *도리옥    古名 정(安定)

1派8世

 

경질공(景質公)

大司憲 開城留後 봉익대부(奉翊大夫) 형조전서(刑曹典書)

 

안원(安瑗) 정(安定)

 1332~1411

암(瑞巖) 병마절도사

경질공(景質公)

大司憲 奉翊大夫 刑曹典書

1派8世

안원숭(安元崇)1


 

 

1332년(충숙왕忠肅복1 壬申)
1353년(공민왕恭愍王2 癸巳) 문과에 급제-공민왕2년계사방恭愍王二年癸巳-1派8世-父-安元崇1
恭愍王癸巳登科
 
1346(충목왕忠穆王2 丙戌)生

1374년(공민왕恭愍王23甲寅) 문과에 급제-공민왕23년갑인방恭愍王二十三年甲寅榜-1派8世-父-安元崇1

홍무(洪武) 갑인(甲寅)에 급제(及第)

 

1411년(태종太宗11辛卯)()함 (1332~1411)壽80. (1346?~1411)壽66?.

大司憲 奉翊大夫 刑曹典書 開城留後 忠臣 시호(諡號) 경질공(景質公)

 

 

 

 

 

(太祖朝)安瑗
順興人文成公裕玄孫父元崇官至政堂文學順城君諡文惠瑗有鷹癖在家左手臂鷹右手翻書而讀李詹過之聞山谷間有讀書聲至則瑗臂鷹右手翻綱目倚樹而讀相視大笑而去[주:大東韻玉]高麗文科累遷至工曹典書恭讓王欲遷都瑗力陳術士妄誕王從之壬申言事忤旨流配于外入本朝累授官不拜及移都漢陽上強之命留守故國後授刑曹典書諡景質[주:人物考]子從約文科牧使從約子玖文科直學玖子知歸世宗朝文科大司成

-國朝人物志-

 

安瑗順興人文成公裕玄孫大提學順興君謚文惠元崇子恭愍王癸巳登科恭讓王初爲言官上䟽極諌壬申以鄭夢周黨杖流遠地國亡隱居瑞原別墅我太祖徙都漢陽鎭撫開城必須舊臣有德望者起瑗爲開城留後瑗力辭又除刑判竟不起豪爽不覊自少好鷹李詹聞山谷間讀書聲謂其僕曰此必安老也至則瑗倚大樹左臂應右手翻綱目朗讀遂相視大笑謚

-紀年便攷-

 

원(瑗)할아버님은 호(號)가 서암(瑞巖)이시다.

1332년 즉 고려28대 충숙왕 복위(復位)원년 임신생(壬申生)이시다.

1353년 공민왕2년 문과에 등과하셔서 한원(翰苑)에 보직(補職)되셨다.

[고려문과] 공민왕(恭愍王) 23년 (1374) 갑인(甲寅) 공민왕 23년 갑인방(恭愍王 二十三年 甲寅榜)

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

그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시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형조전서(刑曹典書)에 오르셨는 바

당시 고려는 명(明)나라의 끈질긴 내정간섭(內政干涉)과 왜구(倭寇)의 준동(蠢動)등등 주변국의 극성(極盛)으로 국정이 불안정한 난국에 조정의 고위요직을 맡아 국난극복에 진충보국하셨다.

이때 왕이 공은 가히 이 나라의 충신(忠臣)이오 라고 공로를 높이 찬양 치사했다고 한다.

 

1390년 공민왕2년에 한양천도(漢陽遷都)를 중지함이 옳다고 상소를 올린일이 있는데 그 상소문의 첫구절을 보면 “위국지본(爲國之本)은 재호득인심(在乎得人心)하고 득인지요(得人之要)는 재호찰사정(在乎察事情)이니 차왕정지소 당선야(此王政之所當先也)라” [以下略] 이렇게 시작해서 우선 국정쇄신(國政刷新)과 위기국난 타개(危機國難 打開)가 당면(當面)한 구국과제(救國課題)인즉 이 이시점에서 천도는 상책이 아님을 강조 설파하였던 것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이조(李朝)가 개국되자 포은당(圃隱黨)관계로 정몽주(鄭夢周)등과 같이 일시 유배(流配)되었다가 바로 풀렸다.

그후 이태조(李太祖)가 할아버님께 누차 고관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의지를 굳히시고 모든 공직을 사양하셨는 바 한성천도(漢城遷都)후에 왕의 특명으로 개성유수(開城留守)를 명하고 이어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除授)하였는데 끝내 사양(辭讓)하시고 취임(就任)을 아니하셨다.

 

말년에는 서원 농서(瑞原 農墅)에서 시문(詩文)을 즐기시며 조용히 여생을 지내셨다.

1411년 신묘 11월13일 향수(享壽) 80세에 세상을 떠나시니 경질(景質)공 이란 시호를 받었다.

 

묘는 문성공조 남록 유좌(酉坐)지원이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하고 개성 표절사(表節祠)에 추향(追享)하였다.

 

부인은 영양군부인 남씨(英陽郡夫人 南氏)이시고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내신 남휘주(南輝珠)공의 따님이시다. 묘는 공조와 합폄이시다.

후부인은 파평군부인 윤씨(坡平郡夫人 尹氏)이시고 선친이 영평군(鈴平君) 윤척(尹陟)공이시다. 묘는 공조 우록 신좌이시다.

슬하에 6남(종약, 종예, 종의, 종염, 종신, 종검)과 5녀를 두셨는데 그 중 장남인 종약(從約)은 전실소생이고 차자 5남과5녀는 후실소생이다.

세향은 매년 음10월1일인 바 망향제로 올린다.

 

경질공 안원(安瑗)

정당문학 원숭(元崇)의 아들로서 1374년(공민왕 23)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전서를 지냈다.

1390년(공양왕 2)국왕이 천도하려고 하자 이는 술사(術士)들의 망령된 행위라고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건국 후에는 정치 참여를 거부하니,

이로써 반대파의 사람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강제로 구도(舊都)의 관리를 맡기니 유후(留後)의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그뒤 태조가 형조전서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하여 몸소 찾아가 간청하여 벼슬에 나아가니,

1401년(태종 1)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서 《대학연의 大學衍義》·《통감집람 通鑑集覽》 등의 서책을 구해왔다.

그뒤 1404년 경상도도관찰사를 지내고 1407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태종의 밀명을 받고 외척으로서 횡포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형제를 탄핵하여 외방으로 유배시켰다.

이어서 판한성부사·개성유후를 역임하고 병사하였다.

위인이 근면성실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였다.

 
 
 
전 개성 유후 “안원”의 졸기(조선왕조실록 편)

전 개성 유후 “안원”의 졸기

◆ 조선왕조실록인 태종실록(태종 22권, 11년(1411 신묘 / 명 영락(永樂) 9년) 11월 13일)에 기록되어진

순흥안씨 휘(諱) 자미(子美)시조로부터 8세이신 “휘 원”선조에 대한 내용이다.

시호(諡號)를 경질(景質)이라 하였다.

 

 

전 개성유후(開城留後) 안원(安瑗)이 졸(卒)하였다.

안원은 순흥(順興) 사람이고 예전 이름은 정(定)인데, 정당 문학(政堂文學) 안원숭(安元崇)의 손자였다.

홍무(洪武) 갑인(甲寅)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어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사람 됨이 온화하고 누그러지고 부지런하고 근신하고 용의(容儀)가 장엄하고 진중하여, 비록 창졸(倉卒)한 일을 당하여도 일찍이 질언(疾言) 거색(遽色)이 없었다. 병이 있으매, 자부(子婦)가 기도하기를 청하니, 말리며 말하기를, ‘천명이 있다.’ 하였다. 죽으니, 나이 66세였다. 조회를 3일 동안을 정지하고, 사제(賜祭)하고, 부의로 종이 1백 50권, 촉(燭) 10정(丁)을 주고, 시호(諡號)를 경질(景質)이라 하였다.  

아들은 6인인데, 안종약(安從約)·안종례(安從禮)·안종의(安從義)·안종렴(安從廉)·안종신(安從信)·안종검(安從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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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開城留後安瑗卒。 瑗, 順興人, 古名定, 政堂文學元崇之孫。 洪武甲寅及第, 歷官至司憲府大司憲。 爲人和緩勤謹, 容儀莊重, 雖當倉卒, 未嘗疾言遽色。 及有疾, 子婦請祈禱, 則止之曰: “有命。” 卒年六十六, 輟朝三日, 賜祭致賻紙百五十卷、燭十丁, 贈諡景質。 子六: 從約、從禮、從義、從廉、從信、從儉。

 
 
안원(安瑗)
안원(安瑗) 순흥인
8世  안원(安瑗) *도리옥 원
호(號)가 서암(瑞巖)이시다. 1332년 즉 고려(高麗) 28대 충숙왕 복위(復位) 원년(元年) 임신생(壬申生)이시다.
1353년 공민왕(恭愍王) 2년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셔서 한원(翰苑)에 보직(補職)되셨다. 그후 여러 관직(官職)을 역임하시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형조전서(刑曹典書)에 오르셨는 바 당시 고려는 명(明)나라의 끈질긴 내정간섭(內政干涉)과 왜구(倭寇)의 준동(蠢動)등등 주변국의 극성(極盛)으로 국정(國政)이 불안정한 난국에 조정의 고위요직을 맡아 국난극복(國難克服)에 진충보국하셨다. 이때 왕(王)이 공은 가히 이 나라의 충신(忠臣)이오 라고 공로(功勞)를 높이 찬양 치사했다고 한다.
1390년 공민왕2년에 한양천도(漢陽遷都)를 중지함이 옳다고 상소(上疏)를 올린일이 있는데 그 상소문(上疏文)의 첫구절을 보면 “위국지본(爲國之本)은 재호득인심(在乎得人心)하고 득인지요(得人之要)는 재호찰사정(在乎察事情)이니 차왕정지소 당선야(此王政之所當先也)라” [以下略] 이렇게 시작해서 우선 국정쇄신(國政刷新)과 위기국난 타개(危機國難 打開)가 당면(當面)한 구국과제(救國課題)인즉 이 이시점에서 천도는 상책이 아님을 강조 설파하였던 것이다.
1392년 고려(高麗)가 망하고 이조(李朝)가 개국(開國)되자 포은당(圃隱黨)관게로 정몽주(鄭夢周) 등과 같이 일시 유배(流配)되었다가 바로 풀렸다.
그후 이태조(李太祖)가 누차 고관(高官)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의지를 굳히시고 모든 공직을 사양(辭讓)하셨는 바 한성천도(漢城遷都)후에 왕의 특명(特命)으로 개성유수(開城留守)를 명하고 이어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除授)하였는데 끝내 사양(辭讓)하시고 취임(就任)을 아니하셨다.
말년(末年)에는 서원(瑞原) 농서(農墅)에서 시문(詩文)을 즐기시며 조용히 여생(餘生)을 지내셨다.
1411년 신묘 11월13일 향수(享壽) 80세에 세상(世上)을 떠나시니 경질(景質)공 이란 시호(諡號)를 받었다.
세향은 매년 음10월1일인 바 망향제로 올린다.
 
경질공 (景質公 ) (1파) 8 世
봉익대부 형조전서(奉翊大夫 刑曹典書)
1332년(고려 충혜왕 2년 ,임신년)에 출생하였다.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 (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 大提學) 문혜공(文惠公) 휘 원숭(元崇)의 맏아들이다.
고려말의 유학자 문성공 휘 향(珦)의 5世孫이며, 문숙공 휘 목(牧)의 손자이다.
호(號)는 서암(瑞巖)이며 고려말 ~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1353년(공민왕 2 계사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전서를 지냈다.
1390년(공양왕 2) 국왕이 천도하려고 하자 이는 술사(術士)들의 망령된 행위라고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건국 후에는 정치 참여를 거부하니,
이로써 반대파의 사람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포은 정몽주의 도당이라 하여 외지로 유배되었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강제로 구도(舊都)의 관리를 맡기니 유후(留後)의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그뒤 태조가 형조전서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한뒤 왕이 직접 공께 찾아와서 간청함에  벼슬길에 나아갔다. 1401년(태종 1)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서 대학연의(大學衍義), 통감집람(通鑑集覽) 등의 서책을 구해왔다.
그 뒤 1404년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1407년 사헌부 대사헌이 되어 태종의 밀명을 받고 외척으로서 횡포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 형제를 탄핵하여 외방으로 유배시켰다.
이어서 판한성부사, 개성유후를 역임했다.
시호를 경질(景質)이라 하였으니 의(義)를 따라서 일을 함에 경(景)이라 하고, 명실(名實)이 어긋나지 않음에 질(質)이라 한다.
서원(瑞原)의 별장에서 거처하다가  1411년(태종 11)에 타계하셨다.
묘소는 문성공의 묘소 남쪽 기슭 유좌(酉坐)이다. 1822년(순조 임오년) 순흥의 용연사(龍淵祠)에 배향되었다.
개성(開城)의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었다.
 
配位는 영양군부인 남씨(英陽郡夫人 南氏)이며, 전리판서 남휘주의 딸이다.
맏아들 판서공 (이조판서 諱 從約)만을 낳고 타계 하셨다.
 
後配는 파평군부인 윤씨(坡平郡夫人 尹氏)로 영평군(鈴平君)에 봉군된 윤척의 딸이다.
윤씨께서는 장자인 판서공을 제외한 5남5녀를 낳으셨다.  
라서 경질공께서는 총11남매를 두셨다.
 
문성공조 남록 유좌(酉坐)지원이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하고 개성(開城) 표절사(表節祠)에 추향(追享)하였다.
 
 
정부인은 영양군부인 남씨(英陽郡夫人 南氏)이시고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내신 남휘주(南輝珠)공의 따님이시다.
묘는 공조와 합폄이시다.
안종약(安從約) 전실소생
 
후부인은 파평군부인 윤씨(坡平郡夫人 尹氏)이시고 선친(先親)이 영평군(鈴平君) 윤척(尹陟)공이시다.
묘는 공조 우록 신좌이시다.
안종례(安從禮) 후실소생, 안종의(安從義) 후실소생, 안종겸(安從廉) 후실소생,안종신(安從信) 후실소생,안종검(安從儉) 후실소생 녀(女)5 녀(女)
 
 
 
문헌(文獻)
1. <서울六百年史>   
 19대 판한성부사 안 원(安 瑗)
 태종 7년(1407) 12월 8일
2. 순흥안씨음사편(順興安氏蔭仕篇)  
 안원[주]전서아조루징부기시경질원숭자조동[주]문부학원제수[주]문한림조동제종약[주]문목사증리판원자
 安瑗[주]典書我朝屢徵不起諡景質元崇子祖同[주]文副學瑗弟垂[주]文翰林祖同弟從約[주]文牧使贈吏判瑗子
 
 
 
 
 
정당문학 원숭(元崇)의 아들. 어머니는 평리 원선(元善)의 딸이다.
충목왕 2년 (1346~태종11년 1411 ) 초명은 정(定). 고려말의 유학자 향(珦)의 5대손이며,
공민왕 23년[1374]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보임되고 , 여러 벼슬을 거쳐 공양왕 2년[139
0]에 형조전서가 되었다.
  그해 겨울 왕이 술사(術士)의 말에 미혹하여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기려 하여 그 불가함
을 간했으나,  왕이 듣지 않고 천도하매, 다시 그는 글월로써 간하기를,
"나라를 다스림의 근본은 인심을 얻음에 있고, 인심을 얻는 요체는 사정을 살핌에 있으니, 이것
이 왕정(王政)의 급선무입니다. 대저 인심은 정사에서 발하여 말에 나타나는 것이매, 그말을 들
어 그정사를 살피면, 그때의 다스림의 잘되고 못됨을  알 수있는 것입니다. 저는 가만히 듣건
데 도읍을 옮김에 손해됨이 많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사하는 백성은 생업을 버리고 먼 길에
살림을 옮기기에 곤란이 많았고, 남아 있는 백성은 의지할 바를 잃고 쓸쓸한 빈 터에 떨어지게
되니 이쪽  저쪽이 함께 수런거리는 지경입니다.  
  앞서 처음 천도할 때 술사의 주장은 '하늘의 괴변이 자주 위에 보이고, 땅의 괴변이 아래에 일
어나니, 이는 대개 지덕(地德)이 쇠한 때문이라, 한양으로  옮기면, 화를 물리칠 수있다.'라고
했으나, 이제 옮긴지 얼마되지 않아, 짐승이 많은 사람을 다치고, 사람이 혹 불궤(不軌)를 도모
<이 무렵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사가 있었다.>하는 등 변괴가 끊이지 않으니, 어찌 술사
의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술사를 믿어 복을 구함이 어찌 덕을 닦아 백성에 순하고 하늘을
공경함만 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는 위로 천시(天時) 를 살피시고,아래로 인사 (人事)를 상고
하사, 도로 환도하면 백성이 다시 살 자리를 얻는 기쁨이 있을 것이며, 실망의 탄식이 없을 것
이니, 전하는 헤아리소서."라고 했으나, 임금은 듣지 않았다가 이듬해에 비로소 깨닫고 다시 개
성에 환도했다.
동4년 이성계 세력에 쓰러지는 고려를 붙들려 하던 충신 정몽주가 암살되고, 판삼사사 우현보
와 그아들 5형제며, 종친 남평군 왕화(王和), 찬성사 안익(安翊), 밀직 최을의(崔乙義), 절제 왕
승귀(王承貴), 좌대언 유정현(柳廷顯), 우대언 허응(許膺) 등 많은 절의의 인물들과 함께 그 또
한 먼지방에 장류되었다가 ,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왕이 되고 나서 풀려 돌아왔다.
왕이 된 이성계(李成桂)는 안원의 인물됨을 알고 여러 번 벼슬로 불렀으며, 한양에 천도하고
는 억지로 개성유휴(開城留後)를 시키려 했고, 또 형조전서에 임명했으나, 그는  모두 물리치
고 나가지 않았으니 고려의 신하로 결코 이성계를 섬길 수는 없다는 뜻에서였다.

성현의 <용재총화>에서,
"안판서 원(瑗)은 매를 좋아하여 소년시절부터 버릇이 되었다. 그가 처가에 있으면서
왼 팔에 매를 앉히고 오른 손으로 책장을 뒤적이며 글을 읽었다. 그장인이 '글을 읽으려면
매를 버리거나, 매가 좋으면 글을 버리거나 할 일이지, 어떻게 함께 두가지를 하느라고
그 고생인고' 라고 하니, 그가 '글은 본래 가문의 업이라 버릴 수 없고 , 천성이 매를 좋아하니
또한 버릴 수 없어 두가지를 다하지만 , 상치됨이 없으니, 안 될 것이 있습니까' 라고 했다.
그는 늙도록 그렇게 즐겼다
쌍매당 이첨(李詹)이 어느 날 한양에 가는 길에 낙하 부근 산골짝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그
종에게 '이는 필시 안씨 노인일게야.' 하고, 가서 보매 ,왼팔에 매를 받고 오른손으로 강목을 뒤
적이며 , 나무에 기대어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서로 보고 크게 웃었다.
공은 사람됨이 너그럽고 침중하여, 평소에 아무리 급한 경우라도 말을 빨리하거나 급한 동작
이 없었다. 한번은 왜구가 승천부를 침략했는데, 그는 집에서 태연히 글을 읽고 있어, 그 종이
도적이 쳐들어 옴을 알리매, '황급히 굴지 말고 아직 활쏘기 연습이나 하고 있거라.' 라고 일렀
다. 이윽고 왜구가 물러갔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정인지(鄭麟止)가 전기를 짓고, 용재 성현(成俔)이 유사를 지었으며, 이만규(李晩규)가 묘명
을 지었다.

 
 
 


1  安子美
 
2  安永儒    安永麟    安永和
 
3  安孚
 
4  安珦
 
5  安于器
 
6  安牧       安愼
 
7  安瑗崇
 
8  安瑗       安祖同     安垂
 
9  安從約    安從禮     安從義     安從廉     安從信     安從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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