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알기
ㆍ작성자 안성규
ㆍ작성일 2016-12-28 (수)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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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을 한 애국지사
독립 운동을 한 애국지사

안병찬
대한청년단 연합회(大韓靑年團 聯合會)를 조직한 총재로서 독립단원을 훈련시킨 독립운동가 안병찬 청년은 "국민의 중심(中心)이요, 국가의 기초(基礎)다. 이번 우리 대한광복사업의 때를 당하여 우리 나라의 흥망(興亡)과 우리 민족의 자유(自由)되고 노예(奴隸)됨은 우리 청년의 활동여부에 달려 있다." 
이 말은 이병찬선생이 만주에서 대한청년연합회를 조직할 때의 취지문의 일부이다. 
선생은 185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치규 호는 규당(規堂)이시다. 1894년(고종 31년) 홍주교임으로 부임하였다.

다음해 단발령이 내리자 의병을 일으켰다가체포되었다. 그 후 흥능주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안창호
민족운동의 대선구자(大先驅者)이며 독립운동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
거짓을 버리고 참을 사랑하며 진실과 실질을 사랑한다. (무실-務實) 빈 말보다 실천에 힘쓰며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노력한다. (역행-力行)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온 정신을 다 하여 대인관계에 믿음을 지킨다. (충의-忠義) 모든 일에 굳은 이지로 적극적이고 진취적(進取的)이며, 개척자적인 창의력을 발휘한다. (용감-勇敢)
이상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결성한 흥사단의 4대 정신이다. 
공은 187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하셨으며 시조공(安子美)의 26세이시다. 족보에는 창호(昌鎬)이고, 창호는 관명이며 호는 도산이다. 공은 일찍이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895년 상경하여 1897년 구세학당을 졸업하고 조교로 있으면서 예수교에 입교하는 한편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11일 평안남도 강서군 도룡섬(대동강 하류)에서 참의공파 25세인 안교진(일명:흥국)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도산은 호(號)이고, 관명은 昌浩, 족보에는 昌鎬이다. (경신보7권1117쪽)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 한 후 민중을 계몽함은 물론 21세의 약관나이에 저 유명한 쾌재정(快哉亭) 연설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5세때 임오군란, 7세때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등 우리 나라가 어려운 때에 60평생을 나라의 독립과 국민 계몽에 일생을 바친 애국자, 혁명가였으며 또 교육자이기도 했다. 
선생은 7세때에 부친을 여의고 조부슬하에서 한학을 배웠다. 
23세때 강서에 점진학교를 설립(남여 공학, 도덕과지식, 애국심이 교육목표) 1902년 전주이씨 혜련(惠鍊)여사와 결혼한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재미교포들의 권익보호와 공립신문을 발행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1907년 귀국해서 평양에 대성학교와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안중근
한국침략의 원흉을 쓰러뜨리고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쓴 의사 안중근(安重根)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주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이 글은 독립기념관 광장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의 어록비에 새겨진 글이다.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이글은 1910년 2월 15일 안병찬 변호사가 안의사를 면회하였을 때 남긴 유언이다
의사(義士)는 시조공의 30세로서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자는 응칠이다. 의사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였고 승마, 궁슬도 익혀 문무를 겸전했다 1989년 천주교에 입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남포에 돈의학교를 세운 후에 만주를 거쳐 블로디보스독으로 망명했다. 1908년(융희 2년)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군사령의 직책을 맡아 의 병군을 이끌고 경흥까지 쳐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


 
안명근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려 했던 항일투사 안명근(安明根)
공은 시조공의 30세로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공은 안중근의사의 종제로서 그는 어랬을 때 부터 종형 중근의 감화를 받고 항일운동에 투신, 한일합병후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남만주에 무관학교의 설립을 계힉하던중 체포되었다. 석방된 후 데라우찌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다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10년만에 출옥했으며 그 후 다시 만주에 망명,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그 곳에서 병사했다.

 
안무
3.1운동후 독립군사령부(獨立軍司令部)를 창설한 안무(安武)
공의 본명은 병호이며 함경북도 종성 출신이다. 공은 1899년 구 한국군 진위대에 입대 경성교련관 양성소를 졸업하고 진위대의 고련관이 되었다. 1907년 군대 해산으로 퇴직 한일합병이 되자 만주 간도로 망명 대한국민회 부회장이 되었다. 
3.1 운동후 독립군 사령부를 창설,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군비를 확충했다.

 
안희제
임시정부의 자금책(資金責)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안희제(安熙濟)선생
선생은 시조공의 24세이시며 1885년 경남의령에서 출생했다. 자는 태약(泰若)이고 호는 백산(白山)이다.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다 21세에 상경 부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양정의숙으로 옮겨 학업을 마쳤다. 
1907년 창남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1908년 의령에 의신학교를, 또 다음 해에는 동래에 구명학교를, 대구에 교남학교를 세우는데 진력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1911년 러시아에 망명 독립순보를 발간했고, 한편 민족계도를 위하여 대종교에 입교했다.

 
안재홍
미군정청(美軍政廳) 민정장관(民政長官)을 지낸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선생
선생은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했으며 호는 민세(民世)이다.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를 졸업, 1916년 중국 상해로 망명

이회녕, 신채호등이 동제사에 가입하였으며 그 후 귀국하여 중앙고보 교감, 기독교 교육부 간사를 역임했다.

안경신
3.1운동 여류독립운동가(女流獨立運動家) 안경신(安敬信)
안경신 여사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3. 1운동 때에 평양 서문동에서 군중을 선동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어 20여일 동안 구금을 당했다. 
이 해 11월 동지들과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김행일과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까이 지냈다


 
민족개화의 선구자

심전 안중식(安中植)
민족서화가(民族書畵家)의 개척자로서 원숙한 화풍을 이룬 대가(大家) 심전(心田)
공은 1861년 서울 청진동에서 태어났다. 초명을 종식, 욱상 자는 공립 호는 심전, 자당, 심전, 경부 등 많은 호를 가지고 있다. 
그는 12세때 양친을 잃었고 1881년 영선사 일행의 제도사로 중국 청진에 가서 1년동안 있으면서 견문을 넓혔다. 1902년 그는 어진도사로 선발되어 화명을 높이게 되었다. 
그 후 경묵당에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11년 이 왕가의 후원으로 서화 미술원이 설립되자 이곳에서 후진양성에 힘을 섰다.

 
안창남

떳다 보아라 안창남,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이는 우리 나라 개화기에 하늘에서 안창남 비행사, 땅에는 엄복동 자전거 선수가 있다고 하는 유행어로서 개화기의 청년들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준 유행어이다. 
공은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우리 나라 최조의 비행사이며 조국 광복을 돕기 위하여 중국에서 교관을 하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안익태
애국가를 작곡한 세계적인 음악지휘자 안익태(安益泰)선생
1905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숭실학교를 수료하였고 일본 국립 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1930년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학교에 입학, 뒤이어 신시내티 음악학교에서 첼로와 작곡을 전공했다.

 
 
 
순흥안문(安門)을 빛낸 근세(近世)의 인물 독립 운동을 한 애국지사

♠독립 운동가 안병찬
♠독립 운동가 도산 안창호
♠의사 안중근
♠항일투사 안명근
♠독립군사령부를 창설한 안무
♠백산회의 안희제선생
♠독립 운동가 안재홍
♠ 여류독립 운동가 안경신
♠민족 개화의 선구자 심전 안중식
♠비행사 안창남
♠음악 지휘자 안익태

♠독립 운동을 한 애국지사
대한청년단 연합회(大韓靑年團 聯合會)를 조직한 총재로서 독립단원을 훈련시킨
독립운동가 안병찬
청년은 국민의 중심(中心)이요, 국가의 기초(基礎)다.
이번 우리 대한광복사업의 때를 당하여 우리 나라의 흥망(興亡)과 우리 민족의 자유
(自由)되고 노예(奴隸)됨은 우리 청년의 활동여부에 다려 있다.
이말은 이병찬선생이 만주에서 대한청년연합회를 조직할 때의 취지문의 일부이다.
선생은 185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으며자는 치규 호는 규당(規堂)이시다.
1894년(고종 31년) 홍주교임으로 부임하였다.
다음해 단발령이 내리자 의병을 일으켰다가체포되었다.
그 후 흥능주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안창호 [安昌浩, 1878.11.9~1938.3.10]
한말의 독립운동가·사상가.
호 도산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평남 강서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호는 도산(島山)이다.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 구세학당(救世學堂)에 들어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쾌재정(快哉亭)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李昇薰)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를 만들어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李甲)·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 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912년 그 곳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회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하였으나 일제가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실패하고,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재투옥되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사망하였다.
그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자주독립을 이룩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육, 즉 국민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가 생겼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참배 나무에는 참배가 열리고 돌배 나무에는 돌배가 열리는 것처럼 독립할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는 독립국의 열매가 있고, 노예될만한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는 망국의 열매가 있다.
개인은 제 민족을 위해서 일함으로 인류와 하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
왜 우리 사회는 이렇게 차오. 훈훈한 기운이없소.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세상을 만들어야 겠소.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해 왔다. 이것은 내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름 : 안중근 安重根 (1879.9.2~1910.3.26)
별칭아명: 안응칠
본관 : 순흥
출생지: 황해도 해주읍 광석동
활동 : 한말의 독립운동가.
1906년 삼흥학교 건립
1907년 연해주로 망명, 의병운동 참가
1909년 구국투쟁동맹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 사살 후 뤼순감옥 수감
1910년 사형선고, 집행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상
주요저서 : <동양평화론>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출생했다.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에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三興)학교(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 인재양성에 힘쓰다가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變)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실패,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했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상의하여 승낙을 얻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柳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旅順]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유필(遺筆)이 있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안명근 [安明根 ?∼?]
독립운동가. 황해남도 신천(信川) 출생. 안중 근(安重根)의 사촌동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항일운동에 투신, 이승훈(李昇薰)·김구(金九) 등 신민회(新民會) 계통의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국권피탈 후 독립군을 양성할 목적으로 남만주에 무관학교의 설립을 계획하고 황해도의 부호들에게서 자금을 염출하다가 체포되었다.
독립운동가. 황해남도 신천(信川) 출생. 안중 근(安重根)의 사촌동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항일운동에 투신, 이승훈(李昇薰)·김구(金九) 등 신민회(新民會) 계통의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국권피탈 후 독립군을 양성할 목적으로 남만주에 무관학교의 설립을 계획하고 황해도의 부호들에게서 자금을 염출하다가 체포되었다. 석방 된 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 을 계획하고 1910년 12월 선천역(宣川驛)에서 거사하려다가 체포되었으며, 일본경찰은 이를 계기로 애국지사의 체포를 위해 105인사건을 조작하였다. 이로 인해 10년간 복역 후 출옥,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지린성[吉林省]에서 병사하였다. 62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3.1운동후 독립군사령부(獨立軍司令部)를 창설한 안무(安武)
공의 본명은 병호이며 함경북도 종성 출신이다.
공은 1899년 구 한국군 진위대에 입대 경성교련관 양성소를 졸업하고 진위대의 고련관이되었다. 1907년 군대 해산으로 퇴직 한일합병이 되자 만주 간도로 망명 대한국민회 부회장이 되었다.3.1 운동후 독립군 사령부를 창설,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하는군비를 확충했다.


♠임시정부의 자금책(資金責)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안희제
(安熙濟)선생
선생은 시조공의 24세이시며 1885년 경남의령에서 출생했다.
자는 태약(泰若)이고 호는 백산(白山)이다.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다 21세에 상경 부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양정의숙으로 옮겨 학업을 마쳤다.
1907년 창남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1908년 의령에 의신학교를, 또 다음 해에는동래에 구명학교를, 대구에 교남학교를 세우는데 진력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1911년 러시아에 망명 독립순보를 발간했고, 한편 민족계도를 위하여 대종교에 입교했다


♠미군정청(美軍政廳) 민정장관(民政長官)을 지낸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선생
선생은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했으며 호는 민세(民世)이다.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를 졸업, 1916년 중국 상해로 망명 이회녕, 신채호등이 동제사에 가입하였으며
그 후 귀국하여 중앙고보 교감, 기독교 교육부 간사를 역임했다.


♠3.1운동 여류독립운동가(女流獨立運動家) 안경신(安敬信)
안경신 여사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3.1운동 때에 평양 서문동에서 군중을 선동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어 20여일 동안 구금을 당했다.
이 해 11월 동지들과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김행일과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까이 지냈다


♠민족개화의 선구자 안중식(安中植)
민족서화가(民族書畵家)의 개척자로서 원숙한 화풍을 이룬 대가(大家)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공은 1861년 서울 청진동에서 태어났다. 초명을 종식, 욱상 자는 공립 호는 심전, 자당,
심전, 경부등 많은 호를 가지고 있다.
그는 12세때 양친을 잃었고 1881년 영선사 일행의 제도사로 중국 청진에 가서 1년동안
있으면서 견문을 넓혔다. 1902년 그는 어진도사로 선발되어 화명을 높이게 되었다.
그 후 경묵당에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11년 이 왕가의 후원으로 서화
미술원이 설립되자 이곳에서 후진양성에 힘을 섰다.


♠안창남 [安昌男, 1900~1930]
한국 최초의 비행사.
출생지 서울
서울 출생. 미동(渼洞)소학교를 졸업하고 휘문(徽文)고보를 중퇴한 뒤 미국인 비행사 스미스의 시범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자동차학교[大阪自動車學校]를 거쳐 아카바네 비행기제작소[赤羽飛行機製作所]에서 비행기 제조법을 배운 뒤 오쿠리 비행학교[小栗飛行學校]에서 조종술을 배우고 졸업 후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1921년 비행사 시험에 합격했고 이 해 도쿄[東京]·오사카[大阪] 사이의 우편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고국방문 비행을 하여 대환영을 받았다. 후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이상재(李商在) 등의 주선으로 상하이[上海]로 가, 옌시산[閻錫山] 장군 휘하의 타이위안[太原] 비행학교 교관이 되었으며, 중국의 혁명전선에 참가했다가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애국가
안익태 [安益泰 1906∼1965]
작곡가·지휘자. 평앙 출생.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수료, 1921년 세이소쿠중학교[正則中學校]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고, 그 뒤 도쿄[東京] 구니타치음악학교[國立音樂學校]에서 첼로를 전공하였다. 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뒤 신시내티음악학교에서 첼로와 작곡을 전공하였다.
작곡가·지휘자. 평앙 출생.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수료, 1921년 세이소쿠중학교[正則中學校]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고, 그 뒤 도쿄[東京] 구니타치음악학교[國立音樂學校]에서 첼로를 전공하였다. 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뒤 신시내티음악학교에서 첼로와 작곡을 전공하였다. 36년 유럽으로 건너가 빈에서 R. 슈트라우스에게 사사하였고 지금의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39년 부다페스트 국립음악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한 뒤 지휘자로서 각국을 순회하며 빈필·베를린필·로마교향악단·부다페스트교향악단 등을 지휘하였다. 57년 귀국하여 자작곡 《강천성악(降天聲樂)》 《한국환상곡(韓國幻想曲)》 등을 지휘하였으며, 61년 다시 귀국하여 63년까지 3차례에 걸쳐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개최하였다. 작품으로 《강천성악》 《한국환상곡》, 첼로곡 《한 송이 흰 백합화》 등이 있다. 1957년 문화포상, 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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