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알기
ㆍ작성자 안성규
ㆍ작성일 2016-12-30 (금) 15:45
ㆍ추천: 0  ㆍ조회: 437       
ㆍIP: 211.xxx.120
1派5世 안우기(安于器)문순공(文順公)

1派5世

안우기(安于器) *어조사 , 그릇

 

문순공(文順公) 문순(文順) = 勤學好問 慈和徧服

                                학문을부지런히힘쓰고중기를좋아함을 (文), 자혜로워사람들이두루복종함을 (順)이라한다.

봉호: 순평군(順平君)

 (1265년~1329년)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찬성사겸판전의시사(檢校僉議贊成事兼判典議寺事)

 

 

安于器文成公裕子字虗中號竹厓以廉幹稱忠宣甞不快於裕故于器有公望而無內援竟

罷職議者惜之官至賛成順平君忠肅己巳卒

 

할아버님 초휘(初諱)는 천(遷)이시고 자(字)가 허중(虛中)이시며 호(號)는 죽옥자(竹屋子),

그리고 시호(諡號)는 문순공(文順公)이시다.

선친이신 문성공의 위업(偉業)을 극계(克繼)하여 문아(文雅)로 현명(賢明)하셨다.

1265년 고려24대 원종6년 을축생(乙丑生)이시다.

1282년 충열왕 8년 약관18세의 홍안소년으로 문과에 등과하셨다.

그후 조정에 몸담아 국학제주(國學祭酒), 우부승지(右副承旨), 밀직부사(密直副使),

대사헌(大司憲),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檢校僉議),

찬성사겸판전의시사(贊成事兼判典儀寺事)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시고

순평군(順平君)에 봉군(封君)되셨다.

1329년 즉 충숙왕16년 기사(己巳) 9월 12일 향수(享壽) 65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문순공(文順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묘는 선고 문성공조(文成公兆) 우측 제1록 자좌지원(子坐之原)이다.

1822년 순흥 용연사(龍淵祠)에 봉향되셨다.

부인은 철원군군부인(鐵原郡君夫人) 최씨(崔氏)이시고 그 선친이 당시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내신

최충약(崔沖若)공 이시다.

묘는 고조우록(考兆右麓) 임좌(壬坐)로 모셨다.

후부인은 이씨(李氏)이신데 생졸년(生卒年), 묘 등이 모두 실전되었으므로 공조(公兆)우측에

추설사단(追設祀壇)해서 모셨다.

세사는 매년 10월 1일인 바 해방후는 금촌 판서공묘역에서 망향제(望鄕祭)로 올린다.

슬하에 이남(장자 목(牧), 차자 신(愼))을 두셨다. 차자인 신(愼)은 후실 이씨 소생이다.

여기에서 차자이신 신(愼)할아버님 댁이 분파(分派)하셨는 바 이 할아버님께서

로부판관(鹵簿判官)을 지내셨으므로 판관공파(判官公派)라고 호칭한다.

 

于器(우기)
字는虛中이고號는竹屋子다一二六五年宋度宗咸淳乙丑生이시며一三二九年忠肅王己巳에卒하시니享年六十五다

一二八二忠烈王壬午에文科하시고翰林에知製誥詞林과寶文의待制를지내고

國學의祭酒를거쳐密直大憲民部摠部二典書로옮기고

匡靖大夫로檢校僉議贊成事하며判典儀寺事를겸하다

順平君을封하다諡를文順이라하니勤學好問曰文이고慈和편服曰順이다

○墓는文成公兆右子坐며一八二二年純廟壬午에順興龍淵祠에모시다
配는鐵原郡夫人崔氏고父는校書郞충若이며祖는密直副使澄이고曾祖는吏部尙書臣胤이다生一男이다

○墓는文成公兆右第一麓에壬坐며歲祀는上同이다
后配는郡夫人李氏고生一男이다○墓는失傳이니公兆右에祀壇을追設하다
○崔拙翁瀣가眞像에贊을지으니衣冠整肅에狀貌端嚴하며律身에寧儉無華하며臨事에有勤不迫이라하다

族侄文貞公인軸이墓誌를짓고眞城李中곤이碣을지으니總錄에있다

 

 

고사,고문서 발취문

 高麗史節要 卷之二十四-忠肅王(고려사절요 제24권-충숙왕(忠肅王)기사 16년, 원 천력 2년

○檢校贊成事安于器,卒,于器,時稱有高節淸德。

 ○ 검교찬성사 안우기(安于器)가 졸하였다. 안우기세상에서 높은 절개와 맑은 덕이 있다고 일컬었다.

 
高麗史節要 卷之二十四(丙辰三年 元 延祐三年)

○罷密直副使,兼大司憲安于器,以元尹趙珝代之,珝,方寵於上王,而于器有公望,

   無內接,識者惜之。

○ 밀직부사 겸 대사헌 안우기(安于器)를 파면하고, 원윤(元尹) 조후(趙珝)를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후는 줄곧 상왕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우기는 여러 사람의 신망은 있으나 조정 안에서

원조하는 자가 없으므로,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기었다.

 

 

故相安竹屋像贊 爲其子益之作

 

衣冠整肅。狀貌端嚴。律身寧儉而毋華。臨事有勤而不迫。進處論思之地。足以福三韓。

退休空寂之鄕。亦自高一世。黃豫章離塵有髮。謝康樂成佛在家。人言風度肖先公。我道典刑觀後嗣。

졸고천백 제1권

 

고(故) 재상(宰相) 안죽옥(安竹屋) 화상찬(畵像贊) 그 아들 익지(益之)를 위하여 지음

 의관은 정숙(整肅)하고 모습은 단정하고 엄숙하다. 몸가짐은 차라리 검소할지언정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으며, 일에 임해서는 부지런하면서도 서두르지 않았다. 관직에 나와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을 때에는 삼한(三韓)을 복되게 하기에 충분했고, 물러나 한적한 시골에서 쉴 때에도 한 세상을 고고하게 살았다. 황예장(黃豫章)은 속세를 떠났으면서도 머리를 길렀고 사강락(謝康樂)은 성불(成佛)하였으면서도 집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공의 풍도(風度)가 부친을 닮았다고 하지만, 나는 공의 풍도를 말하면서 그 아들을 보노라.

안죽옥(安竹屋:안우기) 화상찬(畵像贊)-졸고천백 제1권 -최해(崔瀣)

 

 

送安梁州序 

梁之州距予雞林故里百有餘里。今年夏。予旣除服。自故里廻。適竹屋相公出鎭合浦。爲謁公往。於是道過巚陽。欲宿梁。時方盛暑。天且雨。路人言若雨一夕。梁河漲。數日不可濟。予念告限將滿。行李不可緩。不果入梁宿。直過河而西。望見官舍民居隱見於竹林叢薄之間。人指爲州。因訪風俗。得其一二者焉。厥地俠。厥民輕以肆。厥田皆下濕。歲旱則禾熟。雨則水爲害。其豐儉與他州異。大抵旱不年有。而天豈爲一梁之民恒不雨哉。是故。豐年獨少而凶年相仍。地然也。家無男女。治竹爲用具。貿易他物。衣食租賦。惟竹是仰。而又無鉅商富民賴以取給者。其於使華之往來。館待亦草草。事有不堪支應者。卽皆竄匿竹林中。若驚麇駭鹿然。東南諸州。此州最貧。素稱難治。及李元尹之貶守于此也。公知其弊。先相土田。深其溝洫。而使人必治荒田幾畝。仍出力轉償。又以故俗不閑於農。皆晚出早罷。隨其地分差人勸課。每人十爲保。每保作一簡。先至者受之。授次至者。次次相授。最後者無所授。帶簡而作。至罷。出帶簡者罰之以後至之罪。方其時也。日未辨色。公已在田間。如是十日。人爭爲之先。梁之荒田。闢之幾盡。而簡亦不用之矣。未及半年而公召還。此時公惠未甚著。而人安舊習。向之耕者便不種。而種者亦不樹也。予之過梁也。李公發軔纔月餘矣。予於此。有以見仁人君子不卑小官而以身先民事。而知梁民之貧不獨梁民之過。而在爲政者之勤墮也。今竹屋之子益之得梁之命。因記予所聞於梁者告之。且勉之曰。子第擧李公之政。而勿以梁爲小。則何患乎梁民之不可治。而梁民之貧不可以致富哉。若夫富而敎之之術。則子旣從事於斯學者。奚待予言哉。少年讀書功用。予見梁民之化於子也

 

안 양주(安梁州)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

양주(梁州)고을은 계림(雞林)의 우리 고향과는 100여 리 떨어져 있다. 금년 여름에 내가 상복(喪服)을 벗고 고향에서 돌아오다가, 마침 죽옥(竹屋) 상공(相公)이 외직으로 나와 합포(合浦)의 진(鎭)을 맡았다기에 공을 뵈러 찾아갔다. 이때 헌양(巘陽)을 지나 양주에서 하룻밤 묵으려고 하였는데, 마침 날씨가 매우 더운 데다 비까지 내렸다. 길 가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늘 밤 내내 비가 내리면 양하(梁河)의 물이 불어나 며칠 동안은 건너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나는 정해진 휴가 기한이 다 되어간다는 생각에 걸음을 늦출 수가 없어서 양주로 들어가 묵지 못하고 곧바로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다. 멀리 바라보니 관사(官舍)와 민가(民家)가 우거진 대숲 사이로 보일락 말락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곳을 가리키며 양주 고을이라 하기에 그곳의 풍속에 대하여 물어서 그들로부터 한두 가지나마 듣게 되었다.

양주는 그 지역이 협소하고 백성들은 경박하여 제멋대로이다. 농토가 모두 저습한 지대에 있어서 날씨가 가물면 벼농사가 잘되지만 비가 오면 수해를 입어 풍년과 흉년이 다른 고을과는 정반대로 나타난다. 대체로 해마다 가물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니, 하늘이 어찌 양주 고을 백성들만을 위하여 항상 비를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풍년이 드는 해는 아주 적고 흉년은 해마다 이어지니, 지형이 그러해서이다.

집집마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대나무를 가지고 용구를 만들어 다른 물건과 바꾸어 살아가므로 의식과 조세를 오로지 대나무에 의지한다. 게다가 이를 취급하는 큰 상인이나 부유한 백성들이 없다 보니 사신의 행차가 왕래할 적에 객관(客館)의 대접 또한 초라하며, 그나마도 제공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면 모두들 놀란 노루나 사슴처럼 대숲 속으로 숨어들어가 버린다. 따라서 동남(東南) 지역의 여러 고을 가운데 이 고을이 가장 가난하여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일컬어져 왔다.

이 원윤(李元尹)이 좌천되어 이 고을의 수령이 되자, 공은 그러한 폐단을 파악하고는 먼저 토지를 살펴 도랑을 깊게 파도록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묵은 땅을 몇 이랑씩 개간하게 한 다음 힘을 다해서 방안을 마련하여 이를 보상해 주었다. 또 양주의 옛 습속이 농사를 짓는 데 익숙지 못하여 모두 늦게 나왔다 일찍 끝마치고 돌아갔으므로 지역별로 사람을 보내어 책임을 다하도록 권면하였는데, 백성들을 10명씩 묶어서 보(保)를 만들고, 보마다 대쪽을 1개씩 만든 다음 밭에 먼저 도착한 사람이 이를 받았다가 다음에 온 사람에게 주고, 이렇게 차례차례 전해주게 하였다. 그러면 가장 나중에 온 자는 줄 사람이 없어 대쪽을 차고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일이 끝나면 대쪽을 차고 있는 사람을 나오게 하여 나중에 온 죄를 벌하였다. 그 당시 날이 새기도 전에 공은 이미 개간할 땅에 나와 있었다. 이렇게 한 지 열흘 만에 백성들이 앞다투어 나와서 양주의 묵은 땅이 거의 다 개간이 되었고 대쪽도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반년이 되지 않아 공이 부름을 받아 돌아가게 되니, 이때는 공이 베푼 혜택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은 상태인 데다 백성들이 옛 습관에 안주하여 그동안 갈아놓은 땅에다 파종도 하지 않았고 파종해 놓은 것도 가꾸지 않았다. 내가 양주를 지나던 때는 이공(李公)이 떠난 지 겨우 한 달 남짓 된 무렵이었다. 나는 여기서 인인(仁人)과 군자(君子)는 작은 벼슬도 낮게 여기지 않고 백성들의 일에 솔선함을 보게 되었으며, 양주의 백성이 가난한 것은 비단 양주 백성의 잘못만이 아니라 위정자의 태만함에도 그 책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죽옥 상공의 아들 익지(益之)가 양주를 다스리라는 명을 받았다 해서 내가 양주에서 들은 내용을 기록하여 그에게 고해주면서 또 당부하기를,

 

“그대가 이공의 정사를 채택하고 양주 고을을 작다 여기지 않는다면, 어찌 양주 백성들을 잘 다스리지 못할까 걱정할 게 있겠으며, 가난한 양주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지 못할까 걱정할 게 있겠는가.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백성들을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대가 이미 유학(儒學)을 배웠으니, 어찌 내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그대가 젊어서 글을 읽은 효과를 양주 백성들이 교화되는 것에서 보기를 기대하네.”

하였다.

 ◇ 양주(梁州) : 경상도 양산(梁山)의 옛 지명이다. 죽옥 상공의 아들 익지(益之)-안목

안 양주(安梁州 : 안우기)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졸고천백 제1권 -최해(崔瀣)
최해(崔瀣)

권영(權永)을 지도첨의사사로, 안우기(安于器)를 밀직부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23권-충선왕(忠宣王)계축 5년(1313), 원 황경 2년

○以權溥,爲永嘉君,趙簡,安于器,爲密直副使。

○ 권보(權溥)를 영가군(永嘉君)으로, 조간(趙簡)ㆍ안우기(安于器)를 밀직부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22권-충렬왕 4(忠烈王四)갑진 30년,(1304), 원 대덕 8년

○江南僧紹瓊來,遣承旨安于器,迎于郊,王,率群臣,具禮服,邀至壽寧宮,聽說禪。

○ 강남(江南)의 중 소경(紹瓊)이 왔다. 승지 안우기(安于器)를 보내어 교외에 나아가 영접하게 하고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예복을 갖추어 수녕궁으로 맞아 들여 선(禪)을 설하는 것을 들었다.
 
 
○ 밀직부사(密直副使) 안우기(安于器)를 파면하고, 조후(趙珝)로 대신하였다.
후는 인규(仁規)의 아들로 후에 연수(延壽)라 이름을 고쳤는데 상왕에게 한창 총애를 받았다.

우기는 향(珦)의 아들인데 상왕이 항상 향에 대하여 불쾌하게 여겼던지라,
여러 사람의 신망은 있었으나 안에서 도와 주는 자가 없어 식자(識者)들이 애석하게 어겼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경상도(慶尙道)-풍기군(豐基郡)

【인물】 고려 안유(安裕) 흥주(興州) 사람이다. 뒤의 이름(즉 안향(安珦))은

우리(조선(朝鮮)) 문종(文宗)의 휘(諱)에 저촉되므로 처음 이름을 쓴 것이다.

원종(元宗) 초에 과거에 급제했다. 일찍이 충선왕(忠宣王)을 좇아 원 나라에 갔는데,

원 나라의 승상(丞相)이 전지(傳旨)하기를, “너희 임금은 어찌하여 우리 공주(公主)와 가까이하지 않는가.”하였다.

유가 말하기를, “안방의 일이야 외신(外臣)이 알 수 없는 것이오.

오늘 이것을 가지고 질문하니, 들을 가치가 없지 않겠소.” 하였다. 승상이 이로써 아뢰니,

황제(皇帝 원제(元帝))가 이르기를, “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먼 나라 사람으로 볼 것인가.”하고서 다시 묻지 아니하였다.

벼슬은 중찬(中贊)에까지 이르렀다. 학교(學校)가 날로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고, 또 그의 노비[藏獲]를 들였다.

문장(文章)이 맑고 힘차서 볼 만했으며, 또 감식(鑒識)하는 안목이 있었다.

만년에는 항상 회암(晦菴 주희(朱喜)) 선생의 화상을 걸어 두고 경모(景慕)하다가

드디어 회헌(晦軒)이라는 호(號)를 썼다.

충숙왕(忠肅王) 6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안우기(安于器) 유(裕)의 아들이며 벼슬은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에 이르렀다.

안목(安牧) 우기(于器)의 아들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까지 이르렀다.

안원숭(安元崇) 목(牧)의 아들이며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안축(安軸) 충숙왕(忠肅王) 11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로(遼陽路) 개주(蓋州) 판관(判官)에 제수되었다.

당시 충숙왕(忠肅王)은 원 나라에 잡혀 있었다.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요.

”라 하고는 상서(上書)하여 송사하였다.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한때 표전(表箋)ㆍ사명(詞命)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상주(尙州)에 목사(牧使)로 나가 있을 때 어머니는 흥녕(興寧)에 있었는데 왕래하면서

효도를 다했다.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흥녕군(興寧君)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 《관동와주집(關東瓦注集)》이 있다.

안보(安輔) 축(軸)의 아우이다. 충목왕(忠穆王) 원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행 중서성(遼陽行中書省) 조마(照磨)에 제수되었다. 보는 말하기를,

“수명(授命)하고도 공직(供職)하지 않는 것은 불공(不恭)스럽다.

더구나 조마(照磨)란 단지 문서(文書)를 수장(收掌)하는 것이며 다른 일이 없으니,

내 마땅히 성(省)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관(上官)ㆍ성관(省官)은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겨 예우하였다. 보가 말하기를, “내가 이제 책무는 다하였다. 어머니가 늙으셨으니

돌아가 봉양하지 않는다면 효가 아니다.” 하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나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귀향하여 봉양하기를 청하여 뒤에 동경(東京) 유수(留守)가 되었다.

생산(生産 치부(治富))에 마음 쓰지 아니하여, 죽고 나자 집에는 곡식 한 섬의 저축도 없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안종원(安宗源) 축(軸)의 아들이다. 나이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목왕 때 사한(史翰)으로 선보(選補)되었다, 질(秩)이 차서 옮기게 되었는데

동료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은데 위계가 아래였으므로 종원이 양보했다.

축(軸)은 이를 듣고 기뻐하면서, “도덕이 앞선 이에게 양보한 것이다.

이쪽에서 남에게 양보했으니 누가 이쪽을 버릴 것인가.

우리 집안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으니 번창할 것이다.” 하였다.

신돈(辛旽)이 천권(擅權)할 때, 사대부들이 다투어 붙었다.

집정(執政)에게 붙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자네를 영상(領相)에게 천거하면

간관(諫官)을 얻을 수 있을 것일세.” 하니, 종원은 사양하면서,

“내 본래 게을러서 남에게 붙는 일은 내 재주가 아닐세.”라고 말했다.

집정은 이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벼슬은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본조 안천보(安天保) 태종(太宗) 때의 사람이다.

벼슬은 영돈녕부사(領頓寧府事)에 이르렀다.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구(外舅)이다.

안원(安瑗) 원숭(元崇)의 아들이다. 벼슬은 유후(留後)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안경공(安景恭) 종원(宗源)의 아들이다. 태조(太祖)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으며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하였고,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안순(安純) 경공(景恭)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겸 판호조(判中樞兼判戶曹)에

이르렀다. 치사(致仕)하고 물러나서 금천별서(衿川別墅)에 살았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그에게 가서 물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안숭선(安崇善) 순(純)의 아들이다. 경자과(庚子科)에 장원(壯元)했다.

벼슬은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신증』 안침(安琛)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아들 처선(處善)ㆍ처성(處誠)은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나 일찍 죽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경상도(慶尙道)-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
【명환】
고려 안유(安裕) 합포(合浦)에 진수(鎭守)하면서 군민(軍民)을 돌보니

주군(州郡)이 편안하였다. 나유(羅裕)ㆍ나익희(羅益禧) 세 번이나 합포에 진수하였고,

청렴하고 신중하며 자애롭고 은혜롭다고 일컬어졌다.

안우기(安于器) 합포에 진수하여 청렴하고 일 처리를 잘한다고 일컬어졌다.
 

5세조(世祖) 휘 안우기(安于器)-고려사절요 편

 

고려사절요 제22권

충렬왕 4(忠烈王四)

갑진 30년,(1304), 원 대덕 8년

 

 ○ 강남(江南)의 중 소경(紹瓊)이 왔다. 승지 안우기(安于器)를 보내어 교외에 나아가 영접하게 하고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예복을 갖추어 수녕궁으로 맞아 들여 선(禪)을 설하는 것을 들었다.

--------------------------------------------------------------------------------------------------

고려사절요 제23권

충렬왕 5(忠烈王五)

 을사 31년(1305), 원 대덕 9년

 

○ 한희유(韓希愈)ㆍ김혼(金琿)을 좌우중찬(左右中贊)으로, 왕유소를 찬성사로, 권영(權永)을 지도첨의사사로,

안우기(安于器)를 밀직부사로 삼았다.

--------------------------------------------------------------------------------------------------

고려사절요 제23권

충선왕(忠宣王)

 계축 5년(1313), 원 황경 2년

 

 ○ 권보(權溥)를 영가군(永嘉君)으로, 조간(趙簡)ㆍ안우기(安于器)를 밀직부사로 삼았다.

--------------------------------------------------------------------------------------------------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병진 3년, 원 연우 3년

 밀직부사 겸 대사헌 안우기(安于器)를 파

   
  0
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