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경상도(慶尙道)-풍기군(豐基郡)
【인물】 고려 안유(安裕) 흥주(興州) 사람이다. 뒤의 이름(즉 안향(安珦))은
우리(조선(朝鮮)) 문종(文宗)의 휘(諱)에 저촉되므로 처음 이름을 쓴 것이다.
원종(元宗) 초에 과거에 급제했다. 일찍이 충선왕(忠宣王)을 좇아 원 나라에 갔는데,
원 나라의 승상(丞相)이 전지(傳旨)하기를, “너희 임금은 어찌하여 우리 공주(公主)와 가까이하지 않는가.”하였다.
유가 말하기를, “안방의 일이야 외신(外臣)이 알 수 없는 것이오.
오늘 이것을 가지고 질문하니, 들을 가치가 없지 않겠소.” 하였다. 승상이 이로써 아뢰니,
황제(皇帝 원제(元帝))가 이르기를, “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먼 나라 사람으로 볼 것인가.”하고서 다시 묻지 아니하였다.
벼슬은 중찬(中贊)에까지 이르렀다. 학교(學校)가 날로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고, 또 그의 노비[藏獲]를 들였다.
문장(文章)이 맑고 힘차서 볼 만했으며, 또 감식(鑒識)하는 안목이 있었다.
만년에는 항상 회암(晦菴 주희(朱喜)) 선생의 화상을 걸어 두고 경모(景慕)하다가
드디어 회헌(晦軒)이라는 호(號)를 썼다.
충숙왕(忠肅王) 6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안우기(安于器) 유(裕)의 아들이며 벼슬은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에 이르렀다.
안목(安牧) 우기(于器)의 아들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까지 이르렀다.
안원숭(安元崇) 목(牧)의 아들이며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안축(安軸) 충숙왕(忠肅王) 11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로(遼陽路) 개주(蓋州) 판관(判官)에 제수되었다.
당시 충숙왕(忠肅王)은 원 나라에 잡혀 있었다.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요.
”라 하고는 상서(上書)하여 송사하였다.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한때 표전(表箋)ㆍ사명(詞命)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상주(尙州)에 목사(牧使)로 나가 있을 때 어머니는 흥녕(興寧)에 있었는데 왕래하면서
효도를 다했다.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흥녕군(興寧君)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 《관동와주집(關東瓦注集)》이 있다.
안보(安輔) 축(軸)의 아우이다. 충목왕(忠穆王) 원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행 중서성(遼陽行中書省) 조마(照磨)에 제수되었다. 보는 말하기를,
“수명(授命)하고도 공직(供職)하지 않는 것은 불공(不恭)스럽다.
더구나 조마(照磨)란 단지 문서(文書)를 수장(收掌)하는 것이며 다른 일이 없으니,
내 마땅히 성(省)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관(上官)ㆍ성관(省官)은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겨 예우하였다. 보가 말하기를, “내가 이제 책무는 다하였다. 어머니가 늙으셨으니
돌아가 봉양하지 않는다면 효가 아니다.” 하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나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귀향하여 봉양하기를 청하여 뒤에 동경(東京) 유수(留守)가 되었다.
생산(生産 치부(治富))에 마음 쓰지 아니하여, 죽고 나자 집에는 곡식 한 섬의 저축도 없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안종원(安宗源) 축(軸)의 아들이다. 나이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목왕 때 사한(史翰)으로 선보(選補)되었다, 질(秩)이 차서 옮기게 되었는데
동료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은데 위계가 아래였으므로 종원이 양보했다.
축(軸)은 이를 듣고 기뻐하면서, “도덕이 앞선 이에게 양보한 것이다.
이쪽에서 남에게 양보했으니 누가 이쪽을 버릴 것인가.
우리 집안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으니 번창할 것이다.” 하였다.
신돈(辛旽)이 천권(擅權)할 때, 사대부들이 다투어 붙었다.
집정(執政)에게 붙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자네를 영상(領相)에게 천거하면
간관(諫官)을 얻을 수 있을 것일세.” 하니, 종원은 사양하면서,
“내 본래 게을러서 남에게 붙는 일은 내 재주가 아닐세.”라고 말했다.
집정은 이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벼슬은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본조 안천보(安天保) 태종(太宗) 때의 사람이다.
벼슬은 영돈녕부사(領頓寧府事)에 이르렀다.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구(外舅)이다.
안원(安瑗) 원숭(元崇)의 아들이다. 벼슬은 유후(留後)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안경공(安景恭) 종원(宗源)의 아들이다. 태조(太祖)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으며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하였고,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안순(安純) 경공(景恭)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겸 판호조(判中樞兼判戶曹)에
이르렀다. 치사(致仕)하고 물러나서 금천별서(衿川別墅)에 살았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그에게 가서 물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안숭선(安崇善) 순(純)의 아들이다. 경자과(庚子科)에 장원(壯元)했다.
벼슬은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신증』 안침(安琛)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아들 처선(處善)ㆍ처성(處誠)은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나 일찍 죽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경상도(慶尙道)-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
【명환】 고려 안유(安裕) 합포(合浦)에 진수(鎭守)하면서 군민(軍民)을 돌보니
주군(州郡)이 편안하였다. 나유(羅裕)ㆍ나익희(羅益禧) 세 번이나 합포에 진수하였고,
청렴하고 신중하며 자애롭고 은혜롭다고 일컬어졌다.
안우기(安于器) 합포에 진수하여 청렴하고 일 처리를 잘한다고 일컬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