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알기
ㆍ작성자 안성규
ㆍ작성일 2016-12-30 (금)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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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派9世안종약(安從約)판서공(判書公)
안종약(安從約)
 
1派9世
 
판서공(判書公)
通政 判內資寺事 海州牧使
 
증 정헌대부 이조판서겸동지경연춘추관 성균관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贈 正憲大夫 吏曹判書兼同知經筵春秋館 成均館義禁府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공민왕4년1355(공민왕恭愍王4 乙未)~세종6년1424(세종世宗6 甲辰) 壽70.
 
문과에 합격-창왕즉위년무진방昌王卽位年戊辰榜-1派9世-父-안원(安瑗)1
 
祭享-순흥 용연사(龍淵祠)와 뒤에또 개성표절사(表節祠) 광주(光州) 경현사(景賢祠) 배향(配享)되다.
 
 
安從約
順興人文成公裕五世孫景質公瑗子性正直嚴毅爲世所忌高麗時文科出典十二邑秋毫不犯吏畏民懷以海州牧使
棄官歸周遊自適拜吏曹參議不就弟監察從禮僉樞從誼都正從廉參判從信參議從儉皆有所行誼子致改名玖丁酉文科直提學
-國朝人物志-
 
고려공민왕을미년一三五五년에출생하여 우왕무진년一三八八년에 문과에급제하였다
조선조에서 이조참의를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않고
마침내지방관리로 은둔하여 一二개고을을역임하면서
추호도범함이없었으며 성품이 정직엄숙하고 굳세니 당로자(當路者)들이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해주목사(海州牧使)로써 벼슬을버리고 돌아와 한가로이 유유자적하였다
조선 세종갑진년一四二四년三월八일에 별세하니 향년七○세이다
정헌대부 이조판서겸동지경연춘추관성균관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正憲大夫 吏曹判書 兼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추증하다
순조임오년一八二二년에 순흥의 용연사와 뒤에또 개성의표절사와 광주(光州)의 경현사(景賢祠)에배향되다


[배] 정부인(貞夫人)동래정(東萊鄭)씨로 부친은단성보리찬화공신(端誠輔理贊化功臣)으로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양도공(良度公)정양생(鄭良生)이고
조부는밀직(密直)을지낸 봉산군(蓬山君)정호(鄭瑚)이며  증조는판도진시사(判都津寺事)정유의(鄭惟義)이다
외조는 첨의찬성사(僉議賛成事)로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인 문정공(文貞公)근재(謹齋)안축(安軸)이다

[묘] 파주시교하면야동산八四번지 신(辛)좌상하분이다
        세사는 음력一○월四일이다

예조판서용재(慵齋)성현(成俔)이 유사(遣事)를찬하고十대손직강(直講)영시(永時)가 묘지를찬하며 금계(錦溪)이근원(李根元)이 묘갈을찬하다
또동강(東江)김녕한(金寗漢)이 신도비명을찬하고 단운(丹雲)민병승(閔丙承)이쓴바 총록에실리다

 
 
 

안종약(安從約) 

고려 형조전서 원(瑗)의 아들. 회헌 향(珦)의 5대손,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 남휘주(南暉珠 南輝珠)의 딸이다.

공민왕4년1355~세종6년1424
어려서부터 슬기가 남다르고 배움에 독실 실행에 힘썻으며 , 일찍 문장을 이루었다. 그는 웅위 한 풍채에 천성이 정직하고 굳세며 근엄했다.

용력이 있고 활쏘기에도 뛰어나, 준마를 타고 천 길 절벽을 평지처럼 달리면서 화살을 연방 먹여 쏘아도 한 발도 헛맞힘이 없었다.
우왕(禑王)14년 1388  문과에 급제, 그 수년만에 고려를 뒤엎고 왕이 된 이씨(李氏) 왕조에서 그를 이조 벼슬에 임명하매,

그 아버지가 즐겨 아니하여 "나는 두문동(杜門洞)의 여러분과 뜻을 같이해 왔는데, 네가 어찌 구차로이 이씨 조정의 벼슬에 나가겠느냐."라고 했다.
그는 자주 벼슬에 불려, 마지못해 외직으로 열두 고을의 수령을 차례로 지냈는데, 한결같이 다스림이 청간(淸簡)하여 아전이 두려워했으며,

백성이 즐겨 따랐다. 그가 임천(林川) 고을 원으로 있을 때다. 그곳 풍속이 귀신을 숭상하여, 관아에서 사람이 잇달아 죽으매 관청을 비워두고 ,

부근 다른 데로 옮겨 일을 보고 있었다. 그가 부임하여 비워 둔 관청으로 들어가려 하매, 아전과 백성이 울면서 말렸으나,

그는 듣지 않고 들어가 거처했는데 아무런 변고도 없었다.
모든 민간의 잡귀를 위하는 신당(神堂)이며 요괴의 숲을 모조리 불사르거나 헐어버리게 하매,드디어 재변이 사라짐과 함께 미신의 폐단도 없어졌다.
뒤에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사직하고 물러와 서원(瑞原) 별장에서 시서와 산수를 벗하며 자적했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안영시(安永時)가 묘지(묘지)를 지었다.


 
 
안종약(安從約)

안종약(安從約)
통정대부 이조참의 판서공 (通政大夫 吏曹參議  判書公)   9 世 (1파)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경연춘추관 성균관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추증.
1355년(공민왕4,을미년)에 중경(中京)의 양온동에서 출생한 휘종약(從約)은 원(8世,경질공)의 장남이다.
공의 조고는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을 지냈으며 순성군에 봉해진 문혜공 휘 원숭(元崇)이다.
삼중대광 도첨의중찬(三重大匡都僉議中贊)을 지낸 문성공 휘 향(向)의 5대손이고,
광정대부 검교첨의 찬성사(檢校僉議 贊成事)로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순공인 휘 우기(于器)의 현손이다.
 
관직 및 업적
무진년 1388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성품이 정직하고 엄격하여 풍도를 굳게 지켰으며, 기백이 웅장하였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매양 준마를 타고는 천 길 절벽을 달려 내려가기를 평지와 같이 하였으며,
화살을 서로 연달아 쏘면 한번도 빗맞는 적이 없으니, 당시에 권력가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조정에서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훌륭한 인물이라고 추존하여 천조참의(天曹參議)에 임명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으면서
말씀하기를 "내 두문동(杜門洞)의 여러 분들과 뜻을 말하고 의리를 나타냈으니 어찌 벼슬길에 구차하니 나갈 수 있겠는가"하였다.
설학재(雪壑齋) 정구(鄭玖)에게 준 시(詩)에 '모름지기 고사리를 뜯어먹는 사람이 되겠다.'는 싯귀가 있으니,
여기에서도 뜻을 가탁(假託)한 것을 볼 수 있다.
여러번 외직(外職)을 제수하자, 마침내 억지로 부임하여 열 두 고을을 역임하였는데,
간략하고 청렴하고 신중하여 추호(秋毫)도 범하지 않으니, 관리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은혜롭게 여겼다.
임천(林川)에 부임하였을 때에는 귀신을 숭상하는 풍속등으로 관아가 온통 귀신의 소굴로 폐기되어 있었다.
공이 관아로 들어가려고 하자 관리와 백성들은 울며 만류하였다. 공은 결연히 미신을 타파하고 폐해를 깨끗이 없애고 정리하였다.
고을의 남쪽에 소울음이 울리는 옛 우물과 붉은 난삼(난衫)을 입은 대나무 숲속의 처녀귀신과 보광사(普光寺)의 간사한 중이
뱀으로 화한 것과 서원(瑞原)에 귀신이 씌어서 미친 병을 일으킨 것을 모두 제어하니
당시 사람들은 공이 정대(正大)하고 강의(剛毅)하여 능히 요망한 귀신과 괴이한 것들을 복종시키고 백성을 구제한 것을 존중하였다.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서원(瑞原)의 별장에 거주하면서 시서(詩書)와 거문고와 술로 한가롭게 지내며,
때로는 산수(山水)에 노닐고 고기잡이와 사냥에 즐거움을 붙였으며, 세상의 영화와 이익에 있어서는 초연하여 공중을 지나가는 뜬 구름과 같이 여겼다.
 
묘 소
1424년(세종6,갑진년) 3월 8일에 별세하니 70歲로 장수하셨다.
묘소는 교하(交河)의 아곡방(阿谷坊) 서현(鋤峴) 야동(冶洞) 신좌(辛坐)이다.
 
배위 및 후 손
배위는 정부인 동래정씨(貞夫人 東萊鄭氏)로, 삼중대광 봉원부원군인 양도공(良度公) 정량생(鄭良生)의 딸이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 바 장자직제학을 지낸 구(安玖)로 참찬에 추증되었으며, 둘째판윤(判尹)을 지낸 경(安璟)으로 찬성에 추증되었고,
셋째수(安琇)는 직장(直長)이며,막내리(安理)는 군수(郡守)이다.
사위로는 판서 성염조(成念祖)와 현감을 지낸 박수지(朴遂智)이다
  
[등과인명(登科人名)]
▲고려조 문과(文科)
안종약(安從約) (창왕조) 안순(安純) (창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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