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알기
ㆍ작성자 안성규
ㆍ작성일 2016-12-30 (금)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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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派7世안원숭(安元崇)순성군(順城君) 문혜공(文惠公)
안원숭(安元崇)
1派7世
 
순성군(順城君) 문혜공(文惠公)
시호(諡號) 문혜(文惠) = 勤學好問 柔質慈民
학문을 부지런히 힘쓰고 묻기를 좋아함으로 문(文)이라 하며, 유순하고 질박하여 백성을 사랑함혜(惠)라 한다 
 
광정대부 정당문학 대제학(匡靖大夫 政堂文學 大提學)
 
安元崇牧子登文科官至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順成君謚文憲
 , 順成君, 安元崇, 藝文館大提學, 政堂文學
 
 

안원숭(安元崇)安靖

1309生 高麗忠惠王

按廉使 進賢舘 政堂文學

문혜공(文惠公)

순성군(順城君)大提學

1派7世 

안목(安牧)1


 
안원숭(安元崇)
-順城君 文惠公 정당문학政堂文學 [고려문과]충혜왕忠惠王後2년1341신사辛巳충혜왕後2년신사방忠惠王後二年辛巳榜 
-父-안목(安牧)-1派7世
 

약력(略歷) : 1309 ~

처음 휘는 정(靖)이다 고려조 층선왕(高麗朝忠宣王) 기유년(1309)출생

충혜왕(忠惠王) 신사년(1341)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번 관직을 제수받아 대언(代言)을 거쳐 판서(判書)로 있다가

전주(全州)로 부임 하였으며 얼마 안있다가 광정대부 정당문학대제학(匡靖大夫政堂文學大提學)을 제수받았다.

순성군(順城君)으로 봉하였고 시호는 문혜(文惠)라 하였으니 학문을 부지런히 힘쓰고 묻기를 좋아함으로 문(文)이라 하며 유순하고 질박하여 백성을 사랑함을 혜(惠)라 한다

순조 임오년(1822)에 순흥용연사(順興龍淵祠)에 배향되었다.

 

위는 진한국대부인 원주원씨 (辰韓國大夫人原州元氏)이다 부친은 첨의평리 (僉議評理)를 지낸 선지(善之)이며 조부는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경(卿)이고 증조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문순공(文純公) 부(傳)이다 외조부는 첨의평리(僉議評理)을 지낸 문신공(文愼公) 언양(彦陽) 김변 (金변)이다.

 

는 문성공(文成公) 묘아래 자좌(子坐) 쌍분이다 후손 응창(應昌)이 묘지를 찬하고 참판(參判) 김학수(金鶴洙)가 묘갈(基葛)을 찬한바 총록에 보인다 세사는 1O월 초하루이다.

 

  사위 김사렴(金士廉)은 안동인(安東人)으로 우사간(右司諫)을지냈다 부친은 상락백 (上洛伯) 천(천)이다 아들 간(侃)은 안찰사(按察使)이고 위 는 정랑이며 제 는 부사이고 약 은 소윤(少尹)이며 식(湜)은 좌랑이다 사위는 목사 마희원(馬希遠)이다.

  사위 기윤(奇輪)은 행주인(幸州人)으로 우상시(右常侍)를 지내고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부친은 경왕(敬王)이다 아들은 오자(敖子)와 승지 전룡(田龍)이다.

  사위 성석린(成石璘)은 창녕인(昌寧人)으로 좌의정과 창녕부원군을 지내고 호가 독곡(獨谷)이며 시호가 문정공(文靖公)이다 부친은 시중(侍中) 여완(汝完)이다 아들에 발도(發道)는 좌참찬이고 지도(志道)는 참의이며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인 조휴(趙休)와 고려 종실인 정강군(定剛君) 왕탄(王坦)이다.

  사위 김추(金錘)는 강릉인 (江陵人)으로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냈으며 부친은 명원군(溟源君) 광을(光Z)이다 아들에 이남(以南)은 사령(寺令)이며 윤남(允南)은 감무(監務) 이다 사위에 서환(徐換)은 부령(副令) 이고 유창(兪昶)은 판사(判事)이며 이양명(李陽明)은 사예(司藝)이고 효생(孝生) 은 호군(護軍)이다.사위 김수(金垂)는 좌랑이다.사위 유원지(柳元之)는 문화인(文花人)으로 판중추를 지냈으며 부친은 좌의정 만수(曼殊)이다.

 

 

  인적사항

    배위(配位) : 진한국대부인원주원씨 ( 辰韓國大夫人原州元氏 )

    부모(父母) : 목 (牧)

    자녀(子女) : 원 (瑗)

 

 

  (派) : 추밀공파 ( 樞密公:永儒:1派 )

  세거지(世居地) : 순흥

  묘소(墓所) : 장단부 대덕산 구정리 문성공 묘아래 자좌 쌍분

 
 
안원숭(安元崇)
안원숭(安元崇) 순흥인
7世  안원숭(安元崇) *으뜸 원, 높을 숭
초휘(初諱)가 정(靖)자 이시고 여조방목(麗朝榜目)에는 숭(崇) 또는 림(琳)자로 기록(記錄)돼 있기도 하다.
1309년 즉 고려(高麗) 20대 충선왕(忠宣王) 원년(元年) 기유생(己酉生)이시다.
1341년 신사(辛巳)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대언유판서(代言由判書)로 루차 전주(全州)에 출진하셨으며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등 요직(要職)에 오르셔서
국사에 공헌(貢獻)하신 바 크며 순성군(順城君)에 봉군(封君)되셨다.
졸년(卒年)은 실전(失傳)이 되었고 문혜공(文惠公)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되셨다.
 
순성군(順城君) 문혜공(文惠公)    7世 (1파)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 문혜공 휘 원숭의 初諱(처음의 이름)는 정(靖)이다.
1309년(고려 충선왕1년,기유년)에 출생하였다. 문숙공 목(牧)의 아들이고, 문순공 우기(于器)의 손자이며,
회헌 문성공 향(向)의 증손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2년,신사년)에 문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대언(代言)을 역임했다.
판서(判書)로 있다가 전주(全州)로 부임했었다. 전주에 나가 있을 때에는 학교(유교)의 육성발전에 크게 진흥했다.
그 후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을 제수 받았다.
순성군(順城君)이란 봉호를 받고 얼마 후에 병으로 별세했다. 묘소는 회헌선조의 묘소아래 자좌(子坐)이다.
세사(歲祀)는 음력 10월 초하루이다. 조정에서는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1822년(임오년,순조22)에 순흥의 용연사(順興 龍淵祠)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진한국대부인 원주원씨(辰韓國大夫人 原州元氏)이며, 첨의평리(僉議評理) 원선지(元善之)의 딸이다.
슬하에 9남매(3남 6녀)를 두었는 바 장남은 형조전서를 지낸 경질공 원(瑗)이며,
둘째는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휘 조동(祖同: 양공공파조)이고,
셋째아들은 한림지제고(翰林知製誥)를 지낸 휘 수(垂: 한림공파조)이다.
장녀는 우사간(右司간) 김사렴(金士廉)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우상시(右常侍)를 지낸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 기전룡(奇田龍)에게 출가,
셋째딸은 창녕부원군 독곡 성석린(좌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에게,
다음은 전공판서(典工判書) 김추(金錘)에게 출가했고, 다섯째딸은 좌랑(佐郞) 김수(金垂)에게 출가했고,
막내딸은 판중추(判中樞) 유원지(柳元之: 좌의정 柳曼殊의 아들)에게 출가하였다.
 
문성공 묘하(墓下) 자좌(子坐)지원 쌍분(雙墳)으로 모셔있다.
 
부인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이시고
당시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신 원선지(元善之)공의 따님이시다.
묘(墓) 쌍분(雙墳)
 
자(子) 안원(安瑗),안조동(安祖同),안수(安垂)
          6 녀(女)
 
 

7세조(世祖) 휘 안원숭(安元崇)-고려사절요 편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 3(恭愍王三)

을사 14년(1365), 원 지정 25년

○ 9월에 김보(金普)를 면직하고 지용수(池龍壽)를 지도첨의로, 김원명(金元命)을 삼사좌사로,

김유(金庾)를 동지밀직으로 삼고, 안원숭(安元崇)ㆍ성원규(成元揆)ㆍ김한귀(金漢貴)를 밀직부사로 삼았다.

이때 임군보(任君輔)는 편조의 덕으로 다시 재상이 되었으나 마음 속으로 부끄러움을 품고 왕에게 아뢰기를,

“최영ㆍ이귀수 등은 모두 계묘년의 공신으로서 난리를 평정하고 사직을 편안하게 하였사오니 10세 자손까지도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데도 무슨 죄가 있기에 폄출하였습니까. 더구나 사부(師傅 편조)는 본래 중입니다.

국가에 인재가 부족하더라도 어찌 천한 중에게 정사를 맡게 하여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겠습니까.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군보가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여러 대의 벼슬아치로써

다행히 왕의 은혜를 입어 정부에 봉직하면서 무식한 중으로 하여금 그 간사함을 마음대로 부리게 하였으니,

후대에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겠는가." 하였다. 김보도 또한 왕에게 여러 번 아뢰니 편조가 김보를

참소하여 재상에서 파면시켰다. 군보까지 아울러 내쫓고자 하니 왕이 이르기를, “김보와 임군보가 다시

등용되었는데 이제 다시 아무런 까닭도 없이 모두 내쫓으면 사람들이 나와 경이 사람을 등용하고 물리침을

너무 경솔히 한다고 생각할 것이니, 잠시 후일을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이후로 군보가 정부에 몸을 담고 있어도 국사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안원숭(安元 崇) 
호가 겸재(謙齋), 목(牧)의 아들, 어머니는 정승 김태현(金台鉉)의 딸.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차
례 대언(代言)을 지내며, 매양 비유로 간하여 임금의 잘못을 깨우쳐 뜻을 돌리게 했다.
그 때 흉년이 들어 호남 지방이 더욱 심했는데, 그는 판서(判書)로 전주(全州)에 가서 굶주림
을 구호했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으로, 교학 진흥에 크게 기여했으며, 순성군(順城君)에 봉
해졌다. 성품이 곧으면서 너그러웠고 학식이 해박하고 정밀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한 것이 문(文)이고[勤學好問曰
文], 온유한 자질로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이 혜(惠)이다[柔質慈民曰惠].

 


 

 
 


 

 
 


 


처음 휘는 정(靖)이며 고려조방목에는 숭(崇)이요 한편 림(琳)이라하다.

고려 충선왕 기유년 一三○九년에 출생하다.

충혜왕 신사년 一三四一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누차의 대언(代言)을 거쳐 판서(判書)로 있다가 전주(全州)로 출진(出鎭)하다.

벼슬이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政堂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을제수받았다.

순흥군(順興君)으로봉였고, 시호는문혜(文惠)라하였으니

학문을 부지런히 힘쓰고 묻기를 좋아함으로 문(文)이라하며, 유순하고 질박하여 백성을 사랑함을 혜(惠)라 한다.

순조 임오년(一八二二)에 순흥용연사(順興龍淵祠)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진한국대부인 원주원씨(辰韓國大夫人原州元氏)이다.

부친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낸 선지(善之)이며, 조부는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경(卿)이고,

증조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문순공(文純公) 부(傅)이다.

외조부는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낸 문신공(文愼公) 언양(彦陽) 김변(金賆)이다.

○묘는 문성공(文成公)묘 아래 자좌(子坐)쌍분이다.

○후손 응창(應昌)이 묘지를 찬 하고 참판(叅判) 김학수(金鶴洙)가 묘갈(墓碣)을 찬한 바 총록에 보인다.

○세사는 十월 초하루이다.
 
 
 
 
安元崇
安元崇牧子登文科官至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順成君謚文憲
[주:子瑗見下]
서명 : 紀年便攷v4
 
 
문혜공(文惠公) 안원숭(安元崇) 묘지명

匡靖大夫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 順城君 贈諡文惠公 墓誌

광정대부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 순성군 증시문혜공 묘지


11대손 부사 응창

공의 휘는 원숭(元崇)이요 초휘는 정(靖)이다. 성은 안(安)씨,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증조는 향(珦), 도첨의중찬,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으로 공자의 사당(문묘)에 배식(配食)되었다.

고조는 우기(于器)로 찬성사이며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고(考)는 목(牧)으로 정당문학,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숙공(文淑公)이다.

비(妣)는 화평군부인 김(金)씨, 정승 김태현(金台鉉)의 딸이다.

 

공께서는 공민왕 때 과거에 올라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고 순성군(順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혜공(文惠公)이니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하고 ‘부드러운 자질과 백성을 어여쁘게 하는 것’을 ‘혜(惠)라 한다.

 

배(配)는 원주(原州)원(元)씨, 평리 원선지(元善之)의 딸이다. 고의 관작(官爵)에 따라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삼남육녀(三男六女)를 낳았다. 장남은 원(瑗)으로 개성유후 경질공(景質公), 2남은 조동(祖同)으로 부제학, 3남은 수(垂)이니 한림(翰林)이다.

장녀는 우사간 김사렴(金士廉)에게 시집갔고, 2녀는 덕양부원군 기전룡(奇田龍)에게 시집갔고, 3녀는 창령부원군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에게 시집갔고,

4녀는 판서인 김추(金錘)에게 시집갔고, 5녀는 좌랑인 김수(金垂)에게 시집갔고, 6녀는 유원지(柳元之)에게 시집갔다.

자손들이 크게 불어나 세상에서 조상의 은덕에 식록(食祿)을 보답 받았다고 하더라,

 

장단부 대덕산 남쪽 자좌오향의 언덕에 장례를 모셨으니 곧 증왕고(曾王考)인 문성공의 묘소 좌편에 부장(祔葬)되었으니 쌍분(雙墳)이 우뚝하다.

 

숭정 기묘(1639)년에 분영의 봉분을 수리하여 옛 비석을 간행하며 또한 세계를 서술하여 묘도의 남쪽에 소장하여 환재(患災)에 대비하였다.

 

인조 26년 무자(1648년) 봄에. 11대손 응창은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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